신약_데살로니가후서제3강 스스로 일하여 먹으라

데살로니가후서 제3강

스스로 일하여 먹으라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3:1-18

요절 / 데살로니가후서 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Such people we command and urge in the Lord Jesus Christ to settle down and earn the bread they eat. NIV)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복음전파를 통해 교회가 세워진 후 교회가 가진 문제들을 돕기 위해 씌어졌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의 내용을 보면, 이 땅 위에 있는 교회에 언제나 생기는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데살로니가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론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말씀해 주시기도 하시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게으름과 같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인 3장의 내용은, 서로를 위한 기도, 게으름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 마지막 문안 인사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오늘의 우리를 위해서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배우는 가운데, 가을학기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방향이 되고,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대로, 데살로니가후서를 보낸 가장 큰 목적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장까지에서 그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1절에서 보듯이 ‘끝으로’ 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필요를 느낀 것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항상 결론적으로 깨닫게 되는 위대한 진리가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방향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고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일에는 주의 은혜, 주의 도우심, 주의 축복이 필요하다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내일부터 한 주간은 특별 새벽기도회를 갖고자 하는데, 이 역시도 이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가을학기를 시작하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감당코자 하는 모든 선한 일에 주의 은혜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이 진리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특별한 한 주의 새벽을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1-5절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며,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1,2절에서 말씀 역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데살로니가후서를 쓸 당시, 바울 일행은 항구 도시인 고린도에서 주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이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칠었고, 술 문화, 음란 문화, 우상 숭배 문화가 강하게 사람들을 잡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처럼 안식일마다 그곳의 회당을 찾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대적하며 비방할 뿐이었습니다. 바울의 주요 전도 장소였던 회당 전도에서 아무 역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불사조와 같이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대적들의 반대와 비방 앞에서 많이 위축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셨습니다(행 18:9,10) 바울은 이를 통해서 고린도의 힘든 상황을 바라보기보다 주님과 주님의 소원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힘든 현실을 만날 때, 그럴수록 얼마나 주의 은혜, 주의 도우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신앙이 어린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지만, 간절히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돌아보면, 데살로니가에서의 말씀 역사도 주께서 은혜를 주신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은혜를 주실 때, 고린도에서도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에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소망은 주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게 만들고, 기도를 요청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인근의 캠퍼스에서도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주께서 은혜 주시고 도우실 때 주의 말씀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될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캠퍼스 영혼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 소망으로 인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을 품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 복음 역사를 방해하는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 이들에게서 건져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 역사는 이런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사입니다. 말씀 역사는 주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씀역사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심으로 그들이 바울 일행이 명한 것을 지금도 행하고 앞으로 행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원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내적인 투쟁 방향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서로 사랑하며 모든 박해와 환난을 참고 견뎌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더욱 더 깨닫고 배우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든 상황을 해석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석하되 영적으로 해석을 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내가 겪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즉 하나님 편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실제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을 할 때, 모든 상황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볼 수 있게 되고, 믿음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박해와 환난이라는 상황을 인간적으로 보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피폐하게 만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 어떤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 예로 바울은 그래서 1장에서 하나님의 판단은 옳으며,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빚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받는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그들이 박해와 환난 속에서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더욱 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신 것을 깨닫고 배우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무엇보다 힘써 기도할 것은 말씀역사입니다.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에서와 같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섬기는 인근의 캠퍼스에 퍼져 나가고 영광스럽게 되게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줄기차게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 역사를 섬기는 우리들이 내면적으로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며 성장하고 변화되도록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시대도, 어떤 선교지도 사실 복음을 전하기 쉬운 지역은 없습니다. 그것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란 본성상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보다 자기의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주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요,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니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는 주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주의 말씀을 전하는 역사는 주의 은혜가 정말 필요한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2:4,5절이 말씀하고 있듯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의 역사,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를 생각할 때 다음 한 주간 가을학기 주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는 역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서신을 마무리 하고자 했지만, 아직 한 가지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있는 게으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여기서 보듯이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방향은 단호하고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길이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게으르게 행하고, 사도들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행한다는 말은 대열을 이탈한 군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동안, 그 대열을 이탈하여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남이 일하는 것을 참견하며 시간을 뺏고, 이래저래 폐를 끼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것은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과의 교제를 중단하라는 말입니다. 그들과의 교제를 중단함으로 그들이 일은 하지 않으면서 일을 만들기만 하게 되는 그런 기회를 더 이상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더 이상 자기 할 일도 안 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꾸짖는 것이 되고,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도록 돕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7-9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바울 일행을 본 받아야 할지는 그들이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몸소 보여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이 보여준 것은 그들 가운데서 결코 무질서하게(무절제하게) 생활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그들 중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서 먹고 마실 것을 받을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9:1-15절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군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실 권리가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신령한 것을 뿌리고 그들의 육적인 것을 거둘지라도 과한 것이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셨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그 권리를 쓰지 않은 데는 특별한 뜻이 있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그들에게 본을 보여 자신들을 본받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본이 필요했던 이유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10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바울은 그들 중에서 게으른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고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쉽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게으른 사람들이 일하기를 싫어하면서, 그래서 일하지 않으면서도 살려면 어떻게 하게 됩니까? 일하지 않아도 살려면 먹기는 해야 하니 결국 다른 사람의 수고하여 얻은 것에 기대어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남에게 폐를 끼치고 짐을 지우게 됩니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게으른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때 어떻게 됩니까? 도무지 은혜를 끼칠 수 없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런 신앙적 영향력을 줄 수 없게 됩니다. 남을 섬기고 살리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복음전파를 가로 막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하며,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함께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스스로 본을 보이고자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며 복음을 값없이 전하였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보고 혹시라도 일을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쉬운 직업이 있는 줄로 착각하게 될까봐 권리가 있지만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 사역자가 되면 성도들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르치고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11절에서와 같이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잘못된 종말론이 퍼졌던 것을 기초로 보면, 이들은 아마도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서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곧 세상의 종말이 오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생각하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할 필요도 없고, 힘든 직장생활을 할 필요도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곧 있을 그날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된 열심 때문에 자기만 그렇게 하지 않고 남들도 그렇게 하고자 쫓아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일은 안 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에 참견을 하고, 일을 만드는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밥 먹을 시간이 되어도 자기 집에 가지 않고 미적대다가 결국은 숟가락을 들고 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이들도 함께 예수를 믿는 형제들이기에 좋은 마음으로 대접하고 섬기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낙심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정을 들었을 때 이 문제를 분명히 도와줄 줄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성도들에게 이런 자들과 교제하지 말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의 뿌리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처음부터 가르쳤던 대로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이런 게으름의 문제가 있는 당사자들에게도 분명히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였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일하라는 말은 스스로 일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당장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며 일을 안 하고 일만 만들고 있지만, 실은 그것으로 자기의 게으름을 속이고 있을 뿐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스스로 일해서 자기가 번 것으로 양식을 먹으라고 권하였습니다. 다른 성도들에게는 이들에 대해,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감당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울 일행이 보낸 편지의 권면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원수와 같이 여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 같이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자기들의 문제가 게으름의 문제임을 깨닫고 부끄러운 줄 알고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 중에서와 같이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도 게으름이라는 타락한 인간으로서의 똑 같은 인간적 본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게 되고, 여러 가지를 핑계로 게으르게 행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문화가 정립이 된 서구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성인이 되면 먹고 사는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 문화가 되어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경우에 따라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대개는 일을 하면서, 또 졸업 후에 일해서 갚는 제도를 통해서 공부를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는 아직은 많은 자식들 사이에서 자라며 가난으로 인해 지원을 못 받고 고생을 많이 한 부모 세대들이 키운 한 둘의 자녀들이 현재의 젊은 세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내 자식은 고생하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부모의 좋은 마음으로 자식을 무한정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사지가 멀쩡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어떤 경우에는 대학을 마친 후에도 자기가 일해서 먹지 않고 부모를 의지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댈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댈 수 있게 만든 부모 세대의 책임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게으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

지난 주 한 신문에서 “결혼한 아들이 전화를 했다 “엄마! 바퀴벌레 좀 잡아줘…”(서울신문, 2013-08-24) 라는 재미난 기사제목을 발견했습니다. 사연은 이런 것입니다. 서울 강남의 한 주부가 최근 결혼한 아들 부부와 같은 동의 아파트에 살면서 한 황당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들이 외출한 동안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한 며느리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게 ‘바퀴벌레를 좀 잡아 달라’고 부탁해 달라”고 했답니다. 이에 그 주부는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나약한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답니다. 기사 중에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주제와 연관이 있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들이 결혼한 후에도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부부가 부모에게 물질적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기대면서 부부 갈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복음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은, 스스로 일하여 먹는 사람이 되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손과 발과 머리가 있고 교육을 받았음에도 남을 의지하여 살고자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설령 부모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건강하게 키워주고 교육 시켜 준 부모의 은혜만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를 기초로 이제는 자신이 수고하여 일하며, 가정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장차 자녀 세대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스무 살이 넘어 젊고 사지 멀쩡한 젊은이가 되었는데, 늙은 부모의 땀과 수고를 기대어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요, 하나님 앞에 게으름의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순종하고자 해야 하겠습니다.


16-18절은 편지를 마치는 문안인사입니다.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빌었습니다. 주께서 그들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빌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보내는 편지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친필로 문안인사를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빌었습니다. 바울은 평강과 은혜가 있기를 빌며 편지를 시작하고 편지를 마쳤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강과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은혜 안에서 우리가 우리 시대에 받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기게 되되, 캠퍼스의 젊은이들을 이 시대의 게으름의 문화를 거슬러 스스로 일하며 먹으며 섬기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그런 말씀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에 힘씀으로 주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고, 주의 말씀이 경희대와 외대에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는 말씀 전파 역사를 가을학기에도 계속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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