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메시지 (01. 요한계시록 1:1-20)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1,3)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인 66권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아야 할 말씀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으로 충분하며 완전합니다. 더 하거나 빼거나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요한계시록 공부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창세기 말씀을 배우고 잘 알게 되었듯이, 요한계시록 말씀도 이번에 잘 배우고 알게 되기를 바라며 섬기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배우고 잘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오늘 처음으로 살펴볼 요한계시록 1장 말씀 자체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 말씀은 우리에게 복이 있게 하고, 은혜와 평강이 있게 하시고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절은 요한계시록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인 교회들에게 보이시려고 예수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입니다. 2절에서 보듯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증거하심으로 보게 하신 것을 다 증언하였고, 이것이 요한계시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배우고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복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주신 창세기 1:28 말씀에 처음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에게 선물로서 값없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우주를 지으시고 이를 사람에게 주신 것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것, 낙원 에덴동산을 주신 것, 남자에게 여자를 여자에게 남자를 주신 것,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를 대신하는 자녀를 낳는 것은 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런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게 만들고 영원히 죽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헤쎄드와 에메트)의 하나님(출 34:6),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범죄 후에도 변함없이 사람에게 복이 있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말씀을 주신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속히 이루실 일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 이런 복이 있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모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4절에서 보듯이 요한계시록은 요한에 의해 기록되고, 편지라는 전달 방법을 통해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말씀을 교회에게 주셨습니까? 이는 우리가 다음 주부터 4주에 걸쳐 일곱 교회에게 각각 주신 말씀에서 보게 되겠지만, 5절에서 서론적으로 밝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이 교회에게 있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헬라어의 인사말인 은혜와, 히브리어의 인사말인 평강을 합친 것입니다. 이는 우리 말의 안녕과 같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서 말씀하시는 것, 그 지으신 사람에게 주시려는 모든 좋은 것의 전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복을 설명한 것에 연결해서 보면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시 복을 회복해 주시기를 비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했고 죽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제물로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고 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릴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으로 다시 오실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깨어진 창조 세계도 다시 새롭게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은혜는 바로 이처럼 죄로 인해 영 죽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평강이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죄와 죽음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최초의 샬롬은 창세기 1,2장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과 세상에는 샬롬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샬롬을 다시 회복해 주시고자 일하고 계십니다. 이 일은 초림의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시작되고, 재림의 예수님이 죄와 죽음을 심판하시고, 그때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회복하실 때 완성이 됩니다. 이런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은혜와 평강을 알고 보면, 은혜와 평강처럼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은 바로 이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원하시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요한계시록 말씀을 소원을 가지고 공부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2,3장의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끝에는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공부할 때, 어떻게 듣고 지킬 수 있게 되고, 복이 있고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될 수 있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역사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말씀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요한계시록 말씀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인 오직 예수님 중심의 신앙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b,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것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면 마음에 품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소원은 요한계시록 말씀을 기록해 일곱 교회에게 편지로 전할 때도 간절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피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왜 였습니까? 오직 한 가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평생 죄 가운데 살다가, 그 죄로 인해 영원히 죽는 둘째 사망의 형벌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이 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자기에게 죄를 짓는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겪고, 자기 목숨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사랑의 자리에서 물러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의 사람입니까? 예수님께도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다른 길이 있으면 다른 길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아셨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버리시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시는 그 고난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제자로 삼으시고 사랑으로 섬겨주셨고, 자신도 인생을 걸고 사랑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수 없이 기절하시면서 죽으시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고 온몸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면 울컥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깊이 새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 19:6의 ‘제사장 나라’,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2:9에서 ‘왕 같은 제사장’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신 뜻이 무엇인가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의 왕국에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즉시 멸하시는 대신에, 그들이 제사를 통해 회개함으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이런 자비와 용서를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나 베드로전서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 나라, 왕 같은 제사장,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죄 용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얼마나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피 흘리게 하신 그 영광을 나타내는 종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이 아는 대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어떤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까? 오직 그에게, 예수님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는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6장을 공부할 때 배울 수 있었듯이, 예수님 절대중심의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면서, 어떻게 다른 누구에게나, 자기에게나 조금이라도 영광과 능력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는 예수님에게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거짓 신자는 하나님과 성경도, 성령님도, 예수님조차도, 자기의 배를 채우는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딤전 6:5).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에게 영광과 능력이 있게 하고자 합니다. 지난주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이단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초기 역사 자료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단들의 하나같은 특징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계기로 교회에 나왔지만, 교회에서 자기의 욕심을 위한 이익의 재료, 사업의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무당들이 신내림을 받아 용하게도 아는 것 같이, 디모데전서 4:1의 말씀과 같이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이용하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들을 기막히게 알아내고, 성경을 교묘하게 거짓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론적으로는 하나같이 하나님의 자리에, 성령님의 자리에, 예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두었습니다. 이는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이 무엇으로 구별되는지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에게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고 자기에게 영광과 능력이 있기를 깊은 속에서 바라고 신앙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도 우리가 예수님 절대 중심의 신앙을 위해서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알고, 말씀대로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다 배운 후에는 오직 예수님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바르게 더욱 더 알아가는 참된 신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더욱 더 알아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 말씀대로 재림하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부활 주간에 특강으로 이에 대해서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우리는 ‘볼지어다’고 하는 이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으로 오실 예수님을 항상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은 출애굽기 19:9,16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재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자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게 하신 것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이는 무슨 손오공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으로서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림 때 한 아기가 되어 오셨던 예수님이 재림 때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으로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이 오셨음을 보게 되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때는 신자들만이 아니라 찌른 자로 표현된 예수님을 대적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임할 심판을 알고 애곡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5:32-34에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모든 민족을 예수님 앞에서 영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구분하시고,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로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로서, 전능한 자로서 하신 말씀이기에 확실한 것입니다(8). 그러므로 신자로서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요한계시록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예수님이, 자기의 피로 세운 교회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 오직 교회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20절은 요한계시록 말씀이 예수님을 더욱 더 알게 하고, 예수님의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임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3세기 카르타고 교회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통해 사람들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섬기는 영적 어머니와 같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회를 영적 생명을 낳고 키우는 요회라고 할 때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니라면 요한계시록 말씀은 읽을 필요도 없고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듣고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신 것도 그들이 예수님의 교회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당시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AD 155년에 있었던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였던 폴리캅이 고소를 당해 화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가 받은 고소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시아의 교사이자,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며, 우리 신들(로마의 온갖 신들)의 타도자로서 많은 사람을 잘못 가르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경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것은 그 시대에는 고소를 당하고 이런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뜻에서, 자신을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큰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요한은 음성의 주인공을 알아보려고 돌이켰고,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촛대 사이에는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는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았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요한은 인자 같은 이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압도가 되었고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오른 손을 요한에게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18b-2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예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요한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더욱 더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 쉽습니까? 그의 생각이나 기억 속에 계시는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계셨던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일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요한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더욱 더 알게 된 예수님은 전에 알았던 그 예수님과는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요한이 환상을 통해 보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상징들을 통해 진실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고자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도저히 고개 들고 서 있을 수 없는 분,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요한이 환상 속에 보게 되었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권세와 능력과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이신지를, 요한이 본 환상이 그런 상징을 통해 알게 해 주는 예수님은 진실로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큰 음성으로 들려준 말씀에서처럼,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심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 모습,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20절에서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영광의 예수님이 일곱 금 촛대가 상징하는 모든 교회에 함께 하고 계시며, 일곱 별이 상징하는 모든 교회의 사자 곧 지도자들을 그 능력의 오른 손으로 붙드시고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이 주제를 잊지 않고,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세상의 거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교회로 인한 모든 불안에서 벗어나, 이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깊이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AD 66년에 유대에서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유대를 떠나 에베소로 와서 30여년 사역한 것으로 역사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당시는 밧모라는 돌섬으로 유배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의 문제와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의 연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지도자들을 생각하며 염려와 근심에 빠질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유배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교회와 지도자들을 위해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예수님이 교회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사자들을 그 손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을 얻게 되었고, 이 예수님께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해 편지를 보내면서, 성령의 감동 속에서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기를,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지키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이런 사도 요한의 신앙과 심정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영광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도 요한이 먼저 경험했던 그 은혜와 평강을 우리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시면서, 자신의 피로 세운 교회에 함께 하시고, 이 교회를 위해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을 그 오른손으로 붙드시는 분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의 1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 자체가 요한계시록이 어떤 말씀인지를 소개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예수님의 계시임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요한계시록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잘 배우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고,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나 복음서 말씀과 같이 요한계시록 말씀도 잘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캠퍼스 영혼들에게 바르게 잘 가르쳐 듣고 지키게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01. 요한계시록 1:1-20)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1,3)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인 66권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아야 할 말씀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으로 충분하며 완전합니다. 더 하거나 빼거나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요한계시록 공부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창세기 말씀을 배우고 잘 알게 되었듯이, 요한계시록 말씀도 이번에 잘 배우고 알게 되기를 바라며 섬기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배우고 잘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오늘 처음으로 살펴볼 요한계시록 1장 말씀 자체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 말씀은 우리에게 복이 있게 하고, 은혜와 평강이 있게 하시고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절은 요한계시록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인 교회들에게 보이시려고 예수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입니다. 2절에서 보듯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증거하심으로 보게 하신 것을 다 증언하였고, 이것이 요한계시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배우고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복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주신 창세기 1:28 말씀에 처음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에게 선물로서 값없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우주를 지으시고 이를 사람에게 주신 것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것, 낙원 에덴동산을 주신 것, 남자에게 여자를 여자에게 남자를 주신 것,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를 대신하는 자녀를 낳는 것은 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런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게 만들고 영원히 죽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헤쎄드와 에메트)의 하나님(출 34:6),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범죄 후에도 변함없이 사람에게 복이 있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말씀을 주신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속히 이루실 일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 이런 복이 있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모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4절에서 보듯이 요한계시록은 요한에 의해 기록되고, 편지라는 전달 방법을 통해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말씀을 교회에게 주셨습니까? 이는 우리가 다음 주부터 4주에 걸쳐 일곱 교회에게 각각 주신 말씀에서 보게 되겠지만, 5절에서 서론적으로 밝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이 교회에게 있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헬라어의 인사말인 은혜와, 히브리어의 인사말인 평강을 합친 것입니다. 이는 우리 말의 안녕과 같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서 말씀하시는 것, 그 지으신 사람에게 주시려는 모든 좋은 것의 전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복을 설명한 것에 연결해서 보면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시 복을 회복해 주시기를 비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했고 죽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제물로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고 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릴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으로 다시 오실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깨어진 창조 세계도 다시 새롭게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은혜는 바로 이처럼 죄로 인해 영 죽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평강이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죄와 죽음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최초의 샬롬은 창세기 1,2장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과 세상에는 샬롬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샬롬을 다시 회복해 주시고자 일하고 계십니다. 이 일은 초림의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시작되고, 재림의 예수님이 죄와 죽음을 심판하시고, 그때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회복하실 때 완성이 됩니다. 이런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은혜와 평강을 알고 보면, 은혜와 평강처럼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은 바로 이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원하시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요한계시록 말씀을 소원을 가지고 공부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2,3장의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끝에는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공부할 때, 어떻게 듣고 지킬 수 있게 되고, 복이 있고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될 수 있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역사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말씀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요한계시록 말씀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인 오직 예수님 중심의 신앙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b,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것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면 마음에 품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소원은 요한계시록 말씀을 기록해 일곱 교회에게 편지로 전할 때도 간절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피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왜 였습니까? 오직 한 가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평생 죄 가운데 살다가, 그 죄로 인해 영원히 죽는 둘째 사망의 형벌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이 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자기에게 죄를 짓는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겪고, 자기 목숨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사랑의 자리에서 물러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의 사람입니까? 예수님께도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다른 길이 있으면 다른 길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아셨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버리시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시는 그 고난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제자로 삼으시고 사랑으로 섬겨주셨고, 자신도 인생을 걸고 사랑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수 없이 기절하시면서 죽으시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고 온몸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면 울컥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깊이 새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 19:6의 ‘제사장 나라’,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2:9에서 ‘왕 같은 제사장’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신 뜻이 무엇인가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의 왕국에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즉시 멸하시는 대신에, 그들이 제사를 통해 회개함으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이런 자비와 용서를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나 베드로전서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 나라, 왕 같은 제사장,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죄 용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얼마나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피 흘리게 하신 그 영광을 나타내는 종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이 아는 대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어떤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까? 오직 그에게, 예수님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는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6장을 공부할 때 배울 수 있었듯이, 예수님 절대중심의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면서, 어떻게 다른 누구에게나, 자기에게나 조금이라도 영광과 능력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는 예수님에게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거짓 신자는 하나님과 성경도, 성령님도, 예수님조차도, 자기의 배를 채우는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딤전 6:5).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에게 영광과 능력이 있게 하고자 합니다. 지난주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이단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초기 역사 자료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단들의 하나같은 특징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계기로 교회에 나왔지만, 교회에서 자기의 욕심을 위한 이익의 재료, 사업의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무당들이 신내림을 받아 용하게도 아는 것 같이, 디모데전서 4:1의 말씀과 같이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이용하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들을 기막히게 알아내고, 성경을 교묘하게 거짓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론적으로는 하나같이 하나님의 자리에, 성령님의 자리에, 예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두었습니다. 이는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이 무엇으로 구별되는지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에게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고 자기에게 영광과 능력이 있기를 깊은 속에서 바라고 신앙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도 우리가 예수님 절대 중심의 신앙을 위해서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잘 알고, 말씀대로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다 배운 후에는 오직 예수님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바르게 더욱 더 알아가는 참된 신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더욱 더 알아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 말씀대로 재림하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부활 주간에 특강으로 이에 대해서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우리는 ‘볼지어다’고 하는 이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으로 오실 예수님을 항상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은 출애굽기 19:9,16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재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자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게 하신 것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이는 무슨 손오공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으로서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림 때 한 아기가 되어 오셨던 예수님이 재림 때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으로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이 오셨음을 보게 되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때는 신자들만이 아니라 찌른 자로 표현된 예수님을 대적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임할 심판을 알고 애곡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5:32-34에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모든 민족을 예수님 앞에서 영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구분하시고,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로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로서, 전능한 자로서 하신 말씀이기에 확실한 것입니다(8). 그러므로 신자로서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요한계시록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예수님이, 자기의 피로 세운 교회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 오직 교회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20절은 요한계시록 말씀이 예수님을 더욱 더 알게 하고, 예수님의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임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3세기 카르타고 교회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통해 사람들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섬기는 영적 어머니와 같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회를 영적 생명을 낳고 키우는 요회라고 할 때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니라면 요한계시록 말씀은 읽을 필요도 없고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듣고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신 것도 그들이 예수님의 교회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당시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AD 155년에 있었던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였던 폴리캅이 고소를 당해 화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가 받은 고소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시아의 교사이자,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며, 우리 신들(로마의 온갖 신들)의 타도자로서 많은 사람을 잘못 가르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경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것은 그 시대에는 고소를 당하고 이런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뜻에서, 자신을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큰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요한은 음성의 주인공을 알아보려고 돌이켰고,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촛대 사이에는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는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았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요한은 인자 같은 이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압도가 되었고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오른 손을 요한에게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18b-2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예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요한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더욱 더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 쉽습니까? 그의 생각이나 기억 속에 계시는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계셨던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일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요한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더욱 더 알게 된 예수님은 전에 알았던 그 예수님과는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요한이 환상을 통해 보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상징들을 통해 진실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고자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도저히 고개 들고 서 있을 수 없는 분,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요한이 환상 속에 보게 되었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권세와 능력과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이신지를, 요한이 본 환상이 그런 상징을 통해 알게 해 주는 예수님은 진실로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큰 음성으로 들려준 말씀에서처럼,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심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 모습,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20절에서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영광의 예수님이 일곱 금 촛대가 상징하는 모든 교회에 함께 하고 계시며, 일곱 별이 상징하는 모든 교회의 사자 곧 지도자들을 그 능력의 오른 손으로 붙드시고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이 주제를 잊지 않고,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세상의 거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교회로 인한 모든 불안에서 벗어나, 이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깊이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AD 66년에 유대에서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유대를 떠나 에베소로 와서 30여년 사역한 것으로 역사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당시는 밧모라는 돌섬으로 유배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의 문제와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의 연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지도자들을 생각하며 염려와 근심에 빠질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유배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교회와 지도자들을 위해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예수님이 교회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사자들을 그 손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을 얻게 되었고, 이 예수님께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해 편지를 보내면서, 성령의 감동 속에서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기를,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지키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이런 사도 요한의 신앙과 심정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영광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도 요한이 먼저 경험했던 그 은혜와 평강을 우리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시면서, 자신의 피로 세운 교회에 함께 하시고, 이 교회를 위해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을 그 오른손으로 붙드시는 분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의 1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 자체가 요한계시록이 어떤 말씀인지를 소개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예수님의 계시임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요한계시록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잘 배우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고,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나 복음서 말씀과 같이 요한계시록 말씀도 잘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캠퍼스 영혼들에게 바르게 잘 가르쳐 듣고 지키게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