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_요한계시록03.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편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03. 요한계시록 2:12-29)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편지

(내 이름을, 네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요절 / 요한계시록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오늘 말씀은 주님이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각각의 교회에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면 그 교회는 인간적인 모임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두 교회에게 주시는 칭찬과 책망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 어떤 교회가 되면 안 되는지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 후에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될 때 어떤 상으로 축복해 주실 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고 주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버가모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2:12-17)


주님은 요한에게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자신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있는 칭찬할 것을 알아 주십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안다고 하시면서,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알아 주십니다. 버가모라는 도시는 사탄이 권좌를 두고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곳에 있지만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사탄의 역사로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할 때에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처럼 순교자가 나온 교회였음에도 주님은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발람은 발락에게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던 구약 성경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발람을 보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단한 말로 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뒤로 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는 이런 발람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니골라라는 사람이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당 곧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편지를 마무리 하십니다. 그것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주님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 그래서 그 말씀을 지키는 자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두 가지 축복을 상으로 주십니다. 한 가지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는 것이고, 한 가지는 흰 돌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을 기록해 둘 것이며 받는 사람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이 말씀들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교회는 주님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 주님은 교회의 잘못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속히 임하여 싸우시는 분, 한 마디로 심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뒤에서 배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주님이 행하시는 심판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심판은 꼭 최후의 심판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심판이 현재적으로 임할 때도 있습니다. 앞에 언급된 발람의 교훈을 이스라엘이 따랐던 사건에서, 하나님은 현재형으로 진노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우상숭배 곧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들을 죽이게 하셨고, 염병으로 치심으로 24,000명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는 이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할 일은 경외심을 가지고 회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둘째로, 주님은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발람의 교훈을 지킨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킨다고 할 때의 지킨다는 단어는 말씀을 듣고 지킨다(1:3, 테레오)라고 할 때와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크라테오'로 그 뜻은 ‘붙잡다, 굳게 잡다’입니다. 이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교훈인 말씀이 아니라, 발람의 교훈 곧 니골라 당의 교훈을 꽉 붙잡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보면 참된 신자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예수이며, 이는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구원자로 구별하신 분이라고도 부릅니다.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것은 주님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심판과 형벌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역사로 인해 안디바처럼 죽임을 당해도 주님의 이름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의 니골라 당은 이런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발람의 교훈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것을 꽉 잡고 놓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발람이 가르친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와 음행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고, 세상의 재미를 놓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이단 중에는 구원파 이단도 이런 것을 합리화할 수 있게 하는 논리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그 후에는 어떻게 죄 짓고 살아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구원 받은 신자가 죄 짓고 살아도 된다는 이상한 주장입니다. 이는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구원이 주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발람이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생활하며 날마다 만나를 먹고 율법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런 시기는 지난주 은혜의 찬양 시간의 '광야에서'의 가사가 뜻하듯이,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스라엘 남자들에게는 그 시기가 너무 재미없고 힘든 시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는데 예쁜 모압 여자가 찾아와 유혹하고, 우상의 축제에 참석하며 먹고 즐기게 되자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의 짜릿함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발람의 교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찔리면서도 그것에 끌려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 당시의 버가모 교회에서는 니골라가 발람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잡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가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시대의 현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정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일곱 교회 시대나, 이 시대에서나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는 본질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 한 마디로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들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삶이 실상은 죄와 죽음의 종노릇 하는 삶임을 배운 후에,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계속 배우면서, 더 이상은 자기 세대를 본받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선한 영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배우지 못할 때, 신자라고 해도 미성숙한 신앙과 육체를 입고 있는 현실에 점점 매이게 됩니다. 자기 시대의 풍조, 가치관과 문화를 자기도 모르게 다시 따르게 됩니다. 니골라 당은 바로 그런 신자들이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가르침을 만들어, 자기를 따르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이용하는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들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 성경을 말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지 않고, 교주나 그들 조직을 위하여 살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힘이나 세력, 돈과 명예를 얻고 그것을 교주나 누군가가 뒤에서 차지하고 누리는 악한 사업으로 만듭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이런 악함에 대하여 분명한 경고를 주십니다. 교회에는 이런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심판의 주님으로서 임하셔서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의 어떤 교회든지 자신들의 교회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잡는 사람들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참된 신자로서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섬기고, 회개하지 않는 경우에는 주님의 편에 서서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참된 신자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사람이며, 이런 신자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신앙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이 있을 때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는 목숨을 잃을지라도 주님의 충성된 증인의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비잔틴 작가들의 문헌에는 버가모 당국이 안디바를 놋으로 만들어진 황소의 뱃속에 넣고 그 황소를 불로 달구어 그 안에서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고통에 못이겨 비명을 지르면 마치 황소가 울부짖는 소리가 나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목숨을 빼앗는 박해의 배경에는 사탄이 성도의 믿음을 빼앗고자 하는, 욥기에서와 같은 사탄의 역사가 배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신앙이 있었을 때 그런 사탄의 시험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것은 과연 어떤 신앙을 뜻합니까? 주님을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구원자로 알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은 신앙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주님과의 관계를 깨거나 해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금이 가고 나빠지는 일이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것으로 여기는 신앙입니다.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주님과의 이런 관계안으로 들어가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말씀에서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나타내는 믿음이 되어야 함도 배웠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이런 신앙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자라고 깊어질 때, 우리는 니골라 당의 교훈이 아무리 득세할지라도 자신은 주님 한 분만 사랑하기에 그런 것을 분별하고 멀리할 수 있게 됩니다. 


넷째로,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는 신자들은 주님이 주실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산 소망으로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듣는 자를 이기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들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실 것이며, 받는 자만이 아는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주신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장차 주실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주님은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잡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참된 신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복으로 주십니다. 또한 받은 자만이 아는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상징합니다. 참된 성도는 주님의 재림 때에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흰 돌에 새겨주신 이름이 있는 사람, 주님과 깊은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키운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파 이단의 경우처럼 논리로만 기독교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주님과의 사이를 깊은 믿음과 사랑으로 맺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과 사이가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과 이런 사이가 된 자신에게는 주님이 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게 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마음에 품고 이 땅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2:18-29)


이제 주님은 요한에게 일곱 교회 중의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주님이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들 즉 그들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에베소 교회와 반대로 그들의 나중 행위들이 처음 것보다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두아디라 교회는 잘하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두아디라 교회에도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두아디라 교회가 용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세벨이라고 하신 그 여자는 하나님의 종들인 성도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여자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세벨이 한 일도 니골라 당이 한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세벨에게 회개를 기회를 주었으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한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며,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사망으로 그의 자녀 곧 추종자들을 죽일 것이며, 이를 통해 모든 교회가 주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하실 것이며, 이와 같이 주님은 교회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이 이세벨을 추종하는 것은 아님을 아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아니한 참된 신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는 다른 짐으로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주님이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신자를 뜻하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그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 자신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에게 새벽별을 줄 것을 약속하시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심으로 편지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이 말씀들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은 이세벨이 신자들을 속이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자신은 하나님으로서, 불꽃 같은 눈으로 다 꿰뚫어 보고 있는 속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빛난 주석과 같은 그 발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경외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세벨에게 속아서 용납하는 것을 더 이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회개하지 않고자 하는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을 무섭게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살피며,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갚으실 주님을 새롭게 배우고 경외해야 합니다. 이 주님을 경외함으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일을 지키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는 이세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보면, 교회가 시작될 때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처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12-15에 보면 빌립보 교회가 개척될 때 이곳 두아디라 출신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쓰임 받은 역사가 나옵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해 준 주님의 복음을 듣고 영접하였고, 자기 집을 예배처로 내어놓았던 신앙이 훌륭한 여인이었습니다. 학자들은 두아디라 교회는 아마도 루디아가 고향에 돌아와 복음을 전해 세워진 교회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루디아의 이런 복음적 신앙의 영향 속에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풍성한 교회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겉모습은 요한계시록 시대가 된 30년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그런 교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루디아에서, 이세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다른 여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의 모습은 같고 오히려 더 풍성하고 활발해 보이지만, 그 속을 보시는 주님이 책망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분명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역사인데, 불꽃 같은 눈으로 주님이 그 속을 보실 때는 그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게 만드는 것, 우상숭배라는 행음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주님의 이름을 위한 신앙, 주님과의 깊고 친밀한 사이로 이끄는 신앙이 아닌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 신앙의 형태는 신자들이 이세벨이라는 한 사람에게 매이게 만들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과의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이단들과 사이비에 속한 교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단 교회는 병원사업이나 교육사업에, 어떤 이단 교회는 대사회봉사에 엄청난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고 이미지 세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속에 들어가면 또 다른 이세벨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보다 그들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런 조직의 창시자의 교훈이나 이상한 성경 해석을 더 따릅니다. 이런 모든 행태들은 그런 곳에 속한 사람들의 영혼을 가스라이팅하여, 주님과 그 말씀이 아닌 것을 더 중시하게 만듭니다. 결국은 주님이 주시는 복, 은혜와 평강을 얻지 못하고, 진노와 저주를 받게 만듭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통해서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자 해야 합니다. 


둘째는, 두아디라 교회의 남아 있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건전하고 안전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남아 있는 자들을 두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뭘 모른다는 것은 대개 안 좋은 것,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자로서 몰라도 되는 것,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위 기독교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도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계시록 공부를 준비하면서, 우리나라의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이단들의 초기 발생과 관련한 자료들을 다시 꺼내서 읽어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이단들이 하나 같이 소위 기독교 신비주의라고 하는 체험을 추구하다가 이단들이 되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비주의를 추구할 때 미혹의 영이 그들에게 강하게 역사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신내림을 통해서 무당이 되는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들이 이단들의 발생에 다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귀신이 가르쳐준 이상한 성경해석을 주장하고, 피가름이나 혼음의식과 같은 이상한 행위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단들은 이를 통해 추종자들이 사탄의 깊은 것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위험성을 아시기에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두아디라의 남아 있는 신자들에게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질 때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며, 가르침과 행하심입니다. 이제 그들이 더욱 더 알게 된 재림과 심판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들에게 있는 이것을 굳게 잡을 때 그들은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앙이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가장 건전하고 안전한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참된 신자들이 이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에 참여하게 해 주십니다. 한 마디로 새벽 별을 주십니다. 로마 황제들에게 새벽별인 금성은 승리와 주권을 상징하는 베누스 여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배경으로 승리와 주권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참된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발람의 교훈을 붙잡는 사람들, 이세벨을 추종하며 사탄의 깊은 것인 신비주의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책망하시고 회개를 요구하시며 회개하지 않을 때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신자는 깊은 관심을 그런 것에 두기보다, 주님과의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두어야 합니다. 건전하고 안전한 신앙을 갖게 하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의 본질은 주님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고 듣게 하는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발람의 교훈이 제시하는 욕망의 충족이나, 이세벨이 조장하는 사탄의 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의 위험을 잘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로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주님과의 관계를 키우고자 하며, 이를 위해 주님이 주신 말씀을 굳게 잡고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일을 끝까지 지키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주시는 이런 말씀을 듣고 영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복이 있는 참된 신자가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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