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_데살로니가후서제1강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데살로니가후서 제1강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1:1-12

요절 / 데살로니가후서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All this is evidence that God's judgment is right, and as a result you will be counted worthy of the kingdom of God, for which you are suffering. NIV)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공부하는 성경의 첫 책 창세기 말씀은 바로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반면에 오늘 공부하게 될 데살로니가후서는 요한계시록과 함께, 끝 곧 종말에 관해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시작이 비록 미미했을지라도, 과정이 비록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끝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끝에 대해서 배우고 참으로 이를 준비하고 이를 얻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이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 인류의 시작에 대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로 모든 것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의 유혹과 사람의 범죄로 죄와 죽음도 시작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과 구원의 시작에 대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본래 아브라함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이 죄와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주 두려움과 불신에 빠지고, 옆길로 새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믿음이 점점 자랐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배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죄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믿으면 의롭다 여김 곧 구원을 받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구원을 받은 후에는 믿음이 점점 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어떤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 볼 데살로니가후서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실 때 바로 이 세상의 끝 날이 오게 됩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우리의 구원이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 날에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시작되고 온 세상에 가득차게 된 모든 죄와 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가리켜 성경이 부르는 명칭이 바로 ‘주의 날’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이런 주의 날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 빠졌습니다.

초대 교회 때나 지금이나 역사를 보면 항상 이단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단들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자기들의 탐욕과 정욕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법이 말세가 왔다, 말세의 시대에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를 믿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하나님 내지 재림 예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950년대 말에 전도관이라는 종파를 만든 박태선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통일교의 문선명은 자기를 재림주라고 했고, 그 아류인 JMS의 정명석은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신천지로 불리는 이단이나, 자기를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단 등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열심히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1992년에는 다미선교회라는 이단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해서, 성경의 바른 진리를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이단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해나 환난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우리 각자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개인적인 종말의 날을 내다보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 것도 그들이 주의 날에 예수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보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박해와 환난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소아시아에서 지금의 그리스 반도로 건너와 두 번째로 전도한 지역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습니다. 이를 기초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이심을 전하고, 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도록 권했습니다. 그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행 17장).

그러자 그곳의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여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의 조직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소동을 일으키며 바울과 실라 등의 전도팀을 끌어내어 테러를 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부득이 밤에 그곳에서 피신하여야 했습니다. 바울과 전도팀이 그곳을 떠난 후에도 예수님을 믿은 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모든 박해가 계속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신앙 초기부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이를 잘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다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주의 날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격려하고자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냈습니다. 또 이 후에 그들에게 주의 날에 대한 오해가 생겼음을 듣고는 이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 데살로니가후서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1장에서는 먼저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박해와 환난의 영적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그들에게 왜 고난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이것이 그리스도의 강림의 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1,2절에서 문안인사로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도 양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있기를 빌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모든 호의를 말합니다. 평강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이에 누리는 평화를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 모두가 필요한 것이요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의 - 소위 B.C 시절을 통해서, 또는 죄에 빠지고 시험에 들어 방황한 순간들을 통해서, 은혜와 평강이 없는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와 평강은 오직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환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낼 때보다 믿음이 더욱 자라고 다 각기 사랑함이 풍성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때문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그들을 자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4).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은 초기에 온갖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하면 믿음을 잃게 되기 쉬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박해를 받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환난을 피하게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 온갖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했고 그럼에도 인내하며 믿음이 더욱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여기서 심판은 어떤 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을 뜻합니다. 공의롭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라는 말씀은 ‘이는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온갖 박해와 환난을 당하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을 누가 옆에서 보면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랬다가 아직 어린 그들이 믿음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지나서 보니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은 옳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요, 박해와 환난으로 내면이 피폐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더욱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이는 우리 가운데서도 예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한 형제는 신앙이 깊고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우리 중에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신앙생활 반대라는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름 성경 캠프 참석은 마지막 날 아침까지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신앙을 반대하며 흘리는 눈물을 보았고, 그런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며 캠프 참석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캠프에 참석하는 것은 그에게는 집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캠프 시작하는 날 캠프 참석 준비를 하지 않고 평소처럼 운동을 하러 나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에서 그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운동복을 입은 그대로 캠프에 참석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믿음이 더욱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이 옳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없애주시지 않고 고난을 당하도록 하십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빚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고난을 받을 때 잠시는 불신에 빠지고 괴로워 할 수도 있습니다. 빨리 고난을 없애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고난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지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고난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깨닫고 그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고난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사랑, 죄와 불신, 욕심을 회개하게 됩니다. 고난의 끝인 죽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붙들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믿음이 연단을 받고, 믿음이 순수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이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빚어져 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 후반절에서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고난을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따를 것 같은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은 사실 이 세상을 사는 자는 누구나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피하려고, 온갖 애를 쓴다 할지라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왕에 이런 고난을 받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했습니다(딤후 2:3).

만일 고난이 없다면 본래 교만한 우리는 너무나 교만해지기 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여기며 살게 됩니다. 그것은 말씀 앞에서의 자세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순간순간 세상의 풍조와 상식,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영적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대해 가난하고 간절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늦잠을 자서 못 왔다고 하기도 하지만, 실은 가난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꼭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갈 때는 몇 일 전부터 온갖 신경을 쓰고, 긴장을 하며, 준비를 합니다. 실로 가난한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고난을 겪을 때는 달라집니다. 정신이 들고, 회개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기에 우리가 믿음 이후에 고난도 받게 하십니다. 믿는 자는 고난을 통해서 마음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돌이키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 119:71에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점차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빚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란 아브라함을 통해서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한 후에 고난을 통해 믿음이 더욱 자라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다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 앞에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다(눅 9:62).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성도들로 이렇게 고난 받게 하시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이것이 다라면 성도들로 환난을 받게 하는 세상의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공을 세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6절에 보듯이 하나님은 성도들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는 죄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반면에 환난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공의는 바로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심판의 주가 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날에 성도들은 안식으로 갚아주십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10절에 보면, 그날에 주 예수님께서는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기심을 얻으시게 됩니다. 이는 성도들이 주의 날에 받게 된 안식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성도들은 육신이 약함으로 겪는 모든 죄 문제와 한계와 아픔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이로 인해 주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이 세상에 가득찬 모든 죄의 세력과 모든 악이 다 심판을 받고 완전히 제거된 가운데 하나님이 새롭게 허락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때로부터 하나님이 친히 사람과 함께 계시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21장 3,4절은 이때에 대해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알았기에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볼 때, 인간적인 위로를 하거나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괜히 전도를 해서 고생시킨다며 미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그들이 믿음이 더욱 자라고, 사랑이 더욱 풍성해졌음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고난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의 강림을 바라보며 살도록 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11,12절에는 그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 예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고,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도로서 겪는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고난은 말 그대로 힘들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은 이후에 이런 고난이 없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없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고,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 살기면서 늘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고난이 이렇게 많은가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고난의 과정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으로 허락하신 것임을 배웠습니다. 즉 우리가 받는 고난이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받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믿는 자로서의 어려움을 겪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안식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안식은 너무나 놀라운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는 실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8:18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있을 것만 같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 어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가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을 빨리 없애주시기만을 바라는 자가 되지도 않아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때를 통해 영적으로 배울 것을 깊이 배우고자 해야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이기주의와 쾌락주의로 물든 캠퍼스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믿음으로 공부하고자 할 때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힘들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목자님들은 양들을 돕고 섬기는 고난이 너무나 크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인내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게 하시고,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강림의 날에 하나님이 안식으로 갚아주실 것을 바라보며, 시작과 과정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영광스러운 끝을 준비하는 자가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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