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2강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 ②영적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중인 교회
말씀 / 에베소서 2:1-22
요절 /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NIV)
우리가 지난 주 에베소서 2장의 전편을 통해 들은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예수님 안에서 함께 구원하셨다는 것과, 그 구원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대대로 자랑하시려 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잘 알고 깊이 누릴 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2장의 후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다음 단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영적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전에는 서로 전혀 함께 할 수 없었고, 할 일도 없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설날을 맞아 여러 선교사님들이 본국을 방문하셨는데, 선교사님들의 경우를 들면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과 인도네시아 사람이 함께 교회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 교회 차원에서 보면, 절대로 함께 할 가능성이 없었던 남남북녀가 함께 교회가 되기도 하고, 영호남이 만나 함께 교회가 되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유명한 책 제목처럼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아내는 비록 남남북녀입니다. 그렇다 해도 둘은 한국 사람이고, 옆 동네 대학에 다닌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대본을 쓰시고 연출을 하시지 않았으면 절대로 둘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참 많습니다. 저는 음식을 간간하고 얼큰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반면에 폴린 목자는 싱거운 것, 아무 양념도 안 된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샐러드도 새콤달콤한 드레싱을 듬뿍 쳐야 하고, 찌개도 얼큰해야 합니다. 폴린 목자는 야채를 날로 먹고, 조리를 해도 싱겁게 만듭니다. 그러면 저를 닮은 아들 사무엘은 아예 소금 병을 옆에 놓고 소금을 더 쳐서 먹고, 저도 동조합니다. 음식만 그렇겠습니까? 이러하므로 결혼 초기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지나놓고 보면 별거 아니지만 한 번 갈등이 생기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며 몇몇 일로 말도 안 하는 냉전시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에서 둘이 하나인 교회가 된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먹는 음식의 종류부터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한국 사람은 너무도 좋아하는 불고기, 삼겹살, 항정살, 목살 등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돼지고기는 절대로 못 먹는 데, 한 쪽은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날마다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일 뿐, 그들은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역사와 전통, 문화가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똑 같이 구원을 받고 함께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그런 차이로 인한 어려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본래부터 어떤 곳이 되게 하고자 하셨는가를 통해서 알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보듯이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하자도 모르고, 예수님 예자도 모르던 에베소의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그 피의 은혜로 죄를 속량 받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단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해결된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다처럼 여기기 쉽고, 이로 인해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그래서 죽어도 천국 가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 아니냐?’고 속으로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게 다 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게 다가 아니라면, 무엇이 더 있습니까? 14-16a절은 그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역사의 핵심은 화평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화평은 본질적으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진리에 포함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더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 다가 아니라, 이를 위해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는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담이 생기기 시작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여자 사이는 처음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닭살 관계였습니다. 그랬는데, 죄를 짓고 난 후부터 ‘그 여자와 그 인간’ 사이가 되었습니다. 형과 동생 사이는 살인이 벌어지고, 마침내는 모든 인간들이 언어가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소통이 안 되는 사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 사이의 담을 허물어 버리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벽을 허무십니까?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본체가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 중에 오셔서 임마누엘 하신 것을 말합니다. 마침내는 그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성육신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반목과 분열은 죄 때문에 생긴 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를 담당하심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분열과 반목하게 하는 절망적인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는 별일 아닌 것으로도 반복하고 분열합니다. 오직 서로 사랑해야 할 남편과 아내조차 그렇게 반목하고 갈라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남편과 아내에게 오실 때, 그래서 함께 하실 때, 그런 담을 허물어 주십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한 남편과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한 아내는 서로의 죄와 허물을, 분열하고 반목하게 하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육체로 오신 예수님, 한 없이 낮아지신 예수님, 겸손의 왕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서로를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담도 허물어 주십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여 주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죄인들을 이방인과 같이 여기고, 죄인들과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심으로써, 율법이 이런 벽을 만드는 것을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는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과 이방인들이, 제자들과 죄인 및 세리들이 한 자리에서 잔치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서로 다른 둘을 한 새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온 인류가 유대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중국인도 아니고, 오직 용서 받은 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빈부귀천과 남녀노소와 지위고하의 차이가 없게 하셨습니다. 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인류,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죄가 가져온 분열과 반목의 절망적인 문제에 빠져 멸망하지 않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 몸이 되어 한 몸의 지체가 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둘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 이후에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다음 단계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체처럼 분열과 반목이 없는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물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분열하고 반복할 때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게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면서도 포기하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은 성도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교회의 완성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 곧 죄로 물든 세상에 최후의 심판이 임하고,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 종말의 날에 모습을 드러낼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 땅의 교회가 부족한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베소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려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교회의 뜻을 마음에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되기를 연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전편 10절에서 우리가 구원 받은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임을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힌 대본을 쓰시고, 기가 막힌 연출을 하시고, 감독을 하셔서, 저나 여러분의 구원이라는 걸작품을 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대본과 연출과 감독은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이후에도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극본과 연출과 감독이 계속 됩니다. 우리 각자만이 아니라, 종말의 순간까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그런 작업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최후의 작품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성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이상으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야 할 사람이라는 자기 발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쓰신 대본은 바로 성경입니다. 앞으로 더 배우게 될 에베소서의 4장 이후 말씀은 교회 생활의 그런 대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항상 우리가 해야 할 연기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 십자가의 삶을 본으로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지를 본으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기꺼이 연출을 맡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먼저 감동을 주시고, 어린 양을 물고 가는 곰과 사자를 만날 때, 다윗과 같이 처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울 수 있도록 연기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송하게 되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역사를 위하여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해 주시고, 가까운 데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친히 복음을 전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복음전파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그들이 다시 살아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유대인들이 또한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에베소의 성도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여겨야 합니까? 손님이나 뜨내기가 아닙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건물에 비유해서 말하면, 그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은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건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건물의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의 모퉁이에 놓여 기둥과 벽을 지탱해 주는 큰 주춧돌입니다.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석 역할을 합니다. 무슨 건물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저는 비록 작은 건물이지만, 교회 부속건물의 건축 현장을 날마다 지켜보고 사진도 찍고 그럽니다. 이를 통해 기초를 놓을 때에 다른 층보다 더 많은 철근, 더 두꺼운 콘크리트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1장에서는 교회를 몸에 비유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해, 예수님께서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가 교회로 서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초는 오직 예수님이심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은 예수님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약속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지 않은 것, 근거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공력을 불로 시험할 때 불타고 마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마치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더 큰 건물이 되어 가듯이, 예수님의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연결되어 교회가 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게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동료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의 영적인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고자 성막과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시려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들이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적 성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현실 교회는 예수님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마침내 주 안에서 이런 성전이 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적 성전의 건축 역사를 종말의 때까지 이루어 가십니다.
지난주 페이스 북에 보니 독일로 출장을 간 이효구 목자님이 쾰른 대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보였습니다. 저도 독일에 갔을 때 가본 적이 있는 곳인데, 쾰른 대성당은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 간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쾰른 대성당은 1248년에 착공되어, 약 600년이 걸려 1880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보수 공사가 계속되고 있어서 아직도 건축이 계속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한다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모든 구원 받은 신구약의 성도들로 지어질 교회라는 영적 성전의 건축 역사는 종말의 때까지 계속 지어져 가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건축물의 그림에서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을 따라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가 되고, 영적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현실의 교회이지만, 교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크신 은혜를 경험해 나가며,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을 배우며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교회생활의 모든 것을 이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에 기초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이라면 함께 할 수 없는 담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하나가 되어 화평하며,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화목 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우주적 교회의 지체이기에 합당한 교회가 되고자 끊임없이 준비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와 금주에 걸친 2장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크신 사랑과 그 지극한 은혜로 구원하신 뜻이 바로 이런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임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음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서로 다른 둘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거하시는 영적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다른 둘이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한 새 사람인 것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기초로 우리의 가정과 요회, 캠프와 교회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는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에베소서 제2강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 ②영적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중인 교회
말씀 / 에베소서 2:1-22
요절 /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NIV)
우리가 지난 주 에베소서 2장의 전편을 통해 들은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예수님 안에서 함께 구원하셨다는 것과, 그 구원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대대로 자랑하시려 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잘 알고 깊이 누릴 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2장의 후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다음 단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영적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전에는 서로 전혀 함께 할 수 없었고, 할 일도 없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설날을 맞아 여러 선교사님들이 본국을 방문하셨는데, 선교사님들의 경우를 들면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과 인도네시아 사람이 함께 교회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 교회 차원에서 보면, 절대로 함께 할 가능성이 없었던 남남북녀가 함께 교회가 되기도 하고, 영호남이 만나 함께 교회가 되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유명한 책 제목처럼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아내는 비록 남남북녀입니다. 그렇다 해도 둘은 한국 사람이고, 옆 동네 대학에 다닌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대본을 쓰시고 연출을 하시지 않았으면 절대로 둘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참 많습니다. 저는 음식을 간간하고 얼큰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반면에 폴린 목자는 싱거운 것, 아무 양념도 안 된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샐러드도 새콤달콤한 드레싱을 듬뿍 쳐야 하고, 찌개도 얼큰해야 합니다. 폴린 목자는 야채를 날로 먹고, 조리를 해도 싱겁게 만듭니다. 그러면 저를 닮은 아들 사무엘은 아예 소금 병을 옆에 놓고 소금을 더 쳐서 먹고, 저도 동조합니다. 음식만 그렇겠습니까? 이러하므로 결혼 초기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지나놓고 보면 별거 아니지만 한 번 갈등이 생기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며 몇몇 일로 말도 안 하는 냉전시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에서 둘이 하나인 교회가 된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먹는 음식의 종류부터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한국 사람은 너무도 좋아하는 불고기, 삼겹살, 항정살, 목살 등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돼지고기는 절대로 못 먹는 데, 한 쪽은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날마다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일 뿐, 그들은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역사와 전통, 문화가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똑 같이 구원을 받고 함께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그런 차이로 인한 어려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본래부터 어떤 곳이 되게 하고자 하셨는가를 통해서 알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보듯이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하자도 모르고, 예수님 예자도 모르던 에베소의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그 피의 은혜로 죄를 속량 받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단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해결된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다처럼 여기기 쉽고, 이로 인해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그래서 죽어도 천국 가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 아니냐?’고 속으로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게 다 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게 다가 아니라면, 무엇이 더 있습니까? 14-16a절은 그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역사의 핵심은 화평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화평은 본질적으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진리에 포함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더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 다가 아니라, 이를 위해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는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담이 생기기 시작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여자 사이는 처음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닭살 관계였습니다. 그랬는데, 죄를 짓고 난 후부터 ‘그 여자와 그 인간’ 사이가 되었습니다. 형과 동생 사이는 살인이 벌어지고, 마침내는 모든 인간들이 언어가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소통이 안 되는 사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 사이의 담을 허물어 버리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벽을 허무십니까?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본체가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 중에 오셔서 임마누엘 하신 것을 말합니다. 마침내는 그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성육신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반목과 분열은 죄 때문에 생긴 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를 담당하심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분열과 반목하게 하는 절망적인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는 별일 아닌 것으로도 반복하고 분열합니다. 오직 서로 사랑해야 할 남편과 아내조차 그렇게 반목하고 갈라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남편과 아내에게 오실 때, 그래서 함께 하실 때, 그런 담을 허물어 주십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한 남편과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한 아내는 서로의 죄와 허물을, 분열하고 반목하게 하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육체로 오신 예수님, 한 없이 낮아지신 예수님, 겸손의 왕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서로를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담도 허물어 주십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여 주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죄인들을 이방인과 같이 여기고, 죄인들과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심으로써, 율법이 이런 벽을 만드는 것을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는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과 이방인들이, 제자들과 죄인 및 세리들이 한 자리에서 잔치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서로 다른 둘을 한 새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온 인류가 유대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중국인도 아니고, 오직 용서 받은 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빈부귀천과 남녀노소와 지위고하의 차이가 없게 하셨습니다. 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인류,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죄가 가져온 분열과 반목의 절망적인 문제에 빠져 멸망하지 않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 몸이 되어 한 몸의 지체가 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둘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 이후에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다음 단계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체처럼 분열과 반목이 없는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물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분열하고 반복할 때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게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면서도 포기하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은 성도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교회의 완성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 곧 죄로 물든 세상에 최후의 심판이 임하고,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 종말의 날에 모습을 드러낼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 땅의 교회가 부족한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베소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려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교회의 뜻을 마음에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되기를 연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전편 10절에서 우리가 구원 받은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임을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힌 대본을 쓰시고, 기가 막힌 연출을 하시고, 감독을 하셔서, 저나 여러분의 구원이라는 걸작품을 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대본과 연출과 감독은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이후에도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극본과 연출과 감독이 계속 됩니다. 우리 각자만이 아니라, 종말의 순간까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그런 작업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최후의 작품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성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이상으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야 할 사람이라는 자기 발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쓰신 대본은 바로 성경입니다. 앞으로 더 배우게 될 에베소서의 4장 이후 말씀은 교회 생활의 그런 대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항상 우리가 해야 할 연기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 십자가의 삶을 본으로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지를 본으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기꺼이 연출을 맡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먼저 감동을 주시고, 어린 양을 물고 가는 곰과 사자를 만날 때, 다윗과 같이 처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울 수 있도록 연기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송하게 되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역사를 위하여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해 주시고, 가까운 데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친히 복음을 전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복음전파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그들이 다시 살아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유대인들이 또한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에베소의 성도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여겨야 합니까? 손님이나 뜨내기가 아닙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건물에 비유해서 말하면, 그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은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건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건물의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의 모퉁이에 놓여 기둥과 벽을 지탱해 주는 큰 주춧돌입니다.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석 역할을 합니다. 무슨 건물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저는 비록 작은 건물이지만, 교회 부속건물의 건축 현장을 날마다 지켜보고 사진도 찍고 그럽니다. 이를 통해 기초를 놓을 때에 다른 층보다 더 많은 철근, 더 두꺼운 콘크리트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1장에서는 교회를 몸에 비유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해, 예수님께서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가 교회로 서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초는 오직 예수님이심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은 예수님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약속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지 않은 것, 근거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공력을 불로 시험할 때 불타고 마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마치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더 큰 건물이 되어 가듯이, 예수님의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연결되어 교회가 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게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동료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의 영적인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고자 성막과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시려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들이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적 성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현실 교회는 예수님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마침내 주 안에서 이런 성전이 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적 성전의 건축 역사를 종말의 때까지 이루어 가십니다.
지난주 페이스 북에 보니 독일로 출장을 간 이효구 목자님이 쾰른 대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보였습니다. 저도 독일에 갔을 때 가본 적이 있는 곳인데, 쾰른 대성당은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 간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쾰른 대성당은 1248년에 착공되어, 약 600년이 걸려 1880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보수 공사가 계속되고 있어서 아직도 건축이 계속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한다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모든 구원 받은 신구약의 성도들로 지어질 교회라는 영적 성전의 건축 역사는 종말의 때까지 계속 지어져 가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건축물의 그림에서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을 따라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가 되고, 영적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현실의 교회이지만, 교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크신 은혜를 경험해 나가며,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을 배우며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교회생활의 모든 것을 이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에 기초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이라면 함께 할 수 없는 담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하나가 되어 화평하며,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화목 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우주적 교회의 지체이기에 합당한 교회가 되고자 끊임없이 준비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와 금주에 걸친 2장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크신 사랑과 그 지극한 은혜로 구원하신 뜻이 바로 이런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임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음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서로 다른 둘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거하시는 영적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다른 둘이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한 새 사람인 것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기초로 우리의 가정과 요회, 캠프와 교회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는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