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3강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 ①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 바울
말씀 / 에베소서 3:1-21
요절 / 에베소서 3:19 “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NIV)
몇 년 전 저는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필요한 주제를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특강 말씀으로 당시 필요성을 많이 느꼈던 성령님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면서도 주제의식을 가지고 필요한 주제를 공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작년에 로마서 9-11장과 요나서를 공부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배우고 정리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에베소서 공부는 바로 그런 차원의 연장선에서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단순한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배우고 알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교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당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교회’란 말을 쓰기를 피하면서 ‘센타’라는 말을 썼던 현실의 역사로 인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약한 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지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에베소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공부해 보니, 모든 성경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에베소서 역시 ‘교회론’ 교과서처럼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는 말씀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2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에베소서가 ‘교회의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또한 무엇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가’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찬송 받으실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교회는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에게 머리로 주신 것도 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일들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것을 따라서(요 17: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섬겨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나타내려 하심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하신 일이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에는 서로 다른 게 참으로 많은 사람이요 반목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제 구원의 은혜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서, 이제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이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2장은 이런 교회를 건축물에 비유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이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건축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예수님 위에 굳게 서야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구원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건축물로 비유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곧 영적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적 성전이 완성될 그 날을 소망하며, 성령님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요,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영적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되고자 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2주간 살펴볼 3장 말씀은 1,2장이 설명한 그런 교회가 되도록,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의 원문에는 우리 말 성경이 번역한 ‘말하거니와’라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런 1절은 내용적으로는, 14,15절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빈다는 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2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자기의 처지를 말하고 난 뒤, 이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3절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부연설명임을 표시하는 문장부호(--)를 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3장 말씀도 2주에 걸쳐 살펴보게 될 것이기에, 이 부분이 오늘 우리가 주로 살펴 볼 본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예수의 죄수가 된 사람으로 소개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목에서 말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편지를 시작할 때, 1장 1절에서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임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러므로 나는 사도로서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왜 이 시점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던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어떻게 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자신에 대해 부연설명 한 내용 속에서 그 이유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가 된 것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 된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21장부터 28장까지 전체의 1/4이나 되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길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이 온 천하로 확장되는 역사에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가 된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에서 놀라운 말씀역사, 제자양성역사를 이룬 후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도 바울은 세계의 중심지 로마로 가서 에베소에서와 같은 말씀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비전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일을 꼭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근이 들어 고생하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이방 지역의 교회가 모은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극우파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유대교의 배신자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하려는 일이 주 예수님을 위한 일이기에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하며 기어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결국 바울은 성전에서 정결예식을 행하는 중에, 바울은 그가 하지도 않은 일 곧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오해한 유대인들에게 잡혀 폭행을 당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군대를 이끌고 온 로마의 천부장에 의해 바울은 죽임당하기 전에 극적으로 구출이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은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로마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재판과 몇 년의 구금을 거쳐, 결국은 로마 황제에게 항소함으로 인해 로마로 이송이 되고, 로마의 감옥에서 몇 년 동안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이 바로 바울이 1절에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라고 소개한 배경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1절을 볼 때 바울은 처음에는 아마도 자신이 죄수가 된 것이 이방인을 위하다가 된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하다가 된 것이라고 간단히 말하고자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고 보니 이것은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님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 에베소의 성도들은 갇힌 자 된 바울의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비록 갇힌 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깨닫고 배운 것, 은혜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았고, 그것을 나누는 것도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에베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목자인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부터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에베소의 성도들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주신 것과,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전한 것을 요약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계시로 바울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합니다. 그 내용은 2장에서 바울이 간단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것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으며, 자기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비밀이라고 한 것은 왜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다른 세대 곧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지만, 신약 시대인 이제는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과 복음역사를 위해 성령님의 계시를 받았던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이를 알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6절에서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와 축복들을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체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들을 살리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에 똑 같이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약속들은 영생의 약속, 부활의 약속, 평안에 대한 약속, 성령님에 관한 약속,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 등 성경에 말씀하신 모든 은혜로운 약속들을 다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이렇게 구원을 받고 이런 은혜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그저 지옥의 불쏘시개가 될 자들로 여겼습니다. 만일 이방인이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유대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인과 똑 같이 율법과 제도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엄두를 낼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들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런 비밀을 알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유대인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박해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해서 세상에서 신자들을 없애는 일을 하고 다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일꾼이 되어 있는 것입니까? 7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빈말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는 8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에게 이 은혜를 주셨다고 한 것이 말해 줍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수치스러운 과거를 살짝 지우고, 지극히 잘난 사람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출신이었고, 당대의 대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율법을 흠 없이 지킨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요즈음 말로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이요,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왜 지금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발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기 전, 자기 열심과 영적 무지로 인하여 예수님을 증거 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찬성을 하였고, 그 외에도 수 없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무지하며,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신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고 멸망당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 같은 죄인은 성도 중에 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신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성도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해 주셨고, 심지어 사도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는 새로운 자기 발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자신의 잘나 보이는 과거는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만하여 하나님께 큰 죄를 짓게 된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때 더 이상 그런 것을 생각하며 붙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빌립보에서처럼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대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기억하고, 그런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기초로만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은혜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왜 이렇게 작은 자에게 이 은혜를 주셨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자 하심을 확신하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또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함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임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중에 한 가지를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교회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곧 사탄을 비롯한 악한 영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꽃인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고, 쫄딱 망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각종 지혜는 악한 영들이 도무지 알 수 없고,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이런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그들에게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시고, 악한 영들에게 그들의 악한 일에 대한 심판만이 남아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를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나님께도 교회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런 하나님의 뜻에 쓰시는 것은 11절에서 보듯이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알므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무엇에 대한 설명 중에 나온 것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바울이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예수의 죄수가 된 것을 설명하는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죄수가 되기까지 한 것이 결국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워지게 하고, 놀랍게도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일에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방인들인 에베소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승전의 기념비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3절에서 자신이 죄수가 된 것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바울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한 바울의 여러 환난을 안 좋게 보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의 죄수가 된 것을 두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의 입지나, 교회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고관이 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죄수가 된 것이 좋게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여러 환난을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광으로 보도록 권면합니다. 이는 바울의 여러 환난을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바울이 죄수가 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방인을 위한 것이요,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죄수가 되었기 때문에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쓰시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바울의 여러 환난은 그들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을 통해서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로 소개하고, 이를 부연설명하기까지 한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결론을 통해, 자신이 갇힌 자가 되고 여러 환난이 있는 것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그들의 영광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뜻은 에베소 성도들이나, 우리나 다 바울이 죄수가 된 것을 영적으로 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의 뜻은 우리가 그가 죄수가 된 것을 영적으로 봄으로써,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거두신 승리를 보여주기 위한 참된 삶의 한 장면이요, 하나님께서 그의 각종 지혜로 이끄신 삶임을 알게 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실패요 패배였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절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 망쳐 놓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그 안에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교회를 낳고,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을 통해서 우리도 이 시대에서 복음을 위한 삶에서 영적인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광의 교회가 되기 위한 삶의 길과 전략의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하여는, 예수님을 위하여는 기꺼이 여러 환난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은 삶의 길입니다. 바울을 보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성령님에 붙잡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결국은 결박과 여러 환난을 겪으며, 로마의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 보니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 되었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선포하는 일에 쓰시는 삶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성도들의 삶에는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여러 환난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자녀를 교육하고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너무 벅찬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더하여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임을 알기에 참된 성도로 살고자 하고, 캠퍼스 영혼의 목자로서 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이런 우리의 삶이 참 팍팍하고 여유가 없는 삶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남들은 주말을 즐기고 여행을 즐기는 데,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양들을 위하여 마치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자처럼 사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들일 때는 이런 목자의 삶을 보며 낙심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목자가 되지 말아야지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우리의 삶을 다시 보고, 힘을 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성도로서의 삶,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비록 여러 환난이 있지만, 그것을 세상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되, 먼저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서 측량할 수 없는 예수님의 풍성함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요 복음의 일꾼으로 사는 우리의 삶에 비록 여러 환난이 있을지라도,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확신한 것 같이, 우리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양들의 영광이 될 것을 확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에베소서 제3강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 ①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 바울
말씀 / 에베소서 3:1-21
요절 / 에베소서 3:19 “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NIV)
몇 년 전 저는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필요한 주제를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특강 말씀으로 당시 필요성을 많이 느꼈던 성령님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면서도 주제의식을 가지고 필요한 주제를 공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작년에 로마서 9-11장과 요나서를 공부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배우고 정리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에베소서 공부는 바로 그런 차원의 연장선에서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단순한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배우고 알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교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당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교회’란 말을 쓰기를 피하면서 ‘센타’라는 말을 썼던 현실의 역사로 인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약한 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지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에베소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공부해 보니, 모든 성경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에베소서 역시 ‘교회론’ 교과서처럼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는 말씀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2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에베소서가 ‘교회의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또한 무엇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가’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찬송 받으실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교회는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에게 머리로 주신 것도 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일들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것을 따라서(요 17: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섬겨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나타내려 하심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하신 일이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에는 서로 다른 게 참으로 많은 사람이요 반목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제 구원의 은혜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서, 이제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이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2장은 이런 교회를 건축물에 비유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이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건축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예수님 위에 굳게 서야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구원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건축물로 비유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곧 영적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적 성전이 완성될 그 날을 소망하며, 성령님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요,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영적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되고자 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2주간 살펴볼 3장 말씀은 1,2장이 설명한 그런 교회가 되도록,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의 원문에는 우리 말 성경이 번역한 ‘말하거니와’라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런 1절은 내용적으로는, 14,15절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빈다는 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2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자기의 처지를 말하고 난 뒤, 이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3절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부연설명임을 표시하는 문장부호(--)를 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3장 말씀도 2주에 걸쳐 살펴보게 될 것이기에, 이 부분이 오늘 우리가 주로 살펴 볼 본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예수의 죄수가 된 사람으로 소개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목에서 말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편지를 시작할 때, 1장 1절에서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임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러므로 나는 사도로서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왜 이 시점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던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어떻게 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자신에 대해 부연설명 한 내용 속에서 그 이유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가 된 것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 된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21장부터 28장까지 전체의 1/4이나 되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길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이 온 천하로 확장되는 역사에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가 된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에서 놀라운 말씀역사, 제자양성역사를 이룬 후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도 바울은 세계의 중심지 로마로 가서 에베소에서와 같은 말씀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비전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일을 꼭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근이 들어 고생하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이방 지역의 교회가 모은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극우파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유대교의 배신자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하려는 일이 주 예수님을 위한 일이기에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하며 기어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결국 바울은 성전에서 정결예식을 행하는 중에, 바울은 그가 하지도 않은 일 곧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오해한 유대인들에게 잡혀 폭행을 당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군대를 이끌고 온 로마의 천부장에 의해 바울은 죽임당하기 전에 극적으로 구출이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은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로마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재판과 몇 년의 구금을 거쳐, 결국은 로마 황제에게 항소함으로 인해 로마로 이송이 되고, 로마의 감옥에서 몇 년 동안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이 바로 바울이 1절에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라고 소개한 배경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1절을 볼 때 바울은 처음에는 아마도 자신이 죄수가 된 것이 이방인을 위하다가 된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하다가 된 것이라고 간단히 말하고자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고 보니 이것은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님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 에베소의 성도들은 갇힌 자 된 바울의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비록 갇힌 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깨닫고 배운 것, 은혜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았고, 그것을 나누는 것도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에베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목자인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부터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에베소의 성도들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주신 것과,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전한 것을 요약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계시로 바울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합니다. 그 내용은 2장에서 바울이 간단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것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으며, 자기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비밀이라고 한 것은 왜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다른 세대 곧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지만, 신약 시대인 이제는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과 복음역사를 위해 성령님의 계시를 받았던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이를 알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6절에서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와 축복들을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체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들을 살리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에 똑 같이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약속들은 영생의 약속, 부활의 약속, 평안에 대한 약속, 성령님에 관한 약속,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 등 성경에 말씀하신 모든 은혜로운 약속들을 다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이렇게 구원을 받고 이런 은혜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그저 지옥의 불쏘시개가 될 자들로 여겼습니다. 만일 이방인이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유대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인과 똑 같이 율법과 제도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엄두를 낼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들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런 비밀을 알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유대인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박해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해서 세상에서 신자들을 없애는 일을 하고 다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일꾼이 되어 있는 것입니까? 7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빈말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는 8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에게 이 은혜를 주셨다고 한 것이 말해 줍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수치스러운 과거를 살짝 지우고, 지극히 잘난 사람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출신이었고, 당대의 대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율법을 흠 없이 지킨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요즈음 말로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이요,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왜 지금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발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기 전, 자기 열심과 영적 무지로 인하여 예수님을 증거 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찬성을 하였고, 그 외에도 수 없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무지하며,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신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고 멸망당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 같은 죄인은 성도 중에 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신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성도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해 주셨고, 심지어 사도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는 새로운 자기 발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자신의 잘나 보이는 과거는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만하여 하나님께 큰 죄를 짓게 된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때 더 이상 그런 것을 생각하며 붙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빌립보에서처럼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대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기억하고, 그런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기초로만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은혜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왜 이렇게 작은 자에게 이 은혜를 주셨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자 하심을 확신하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또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함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임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중에 한 가지를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교회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곧 사탄을 비롯한 악한 영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꽃인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고, 쫄딱 망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각종 지혜는 악한 영들이 도무지 알 수 없고,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이런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그들에게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시고, 악한 영들에게 그들의 악한 일에 대한 심판만이 남아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를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나님께도 교회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런 하나님의 뜻에 쓰시는 것은 11절에서 보듯이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알므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무엇에 대한 설명 중에 나온 것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바울이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예수의 죄수가 된 것을 설명하는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죄수가 되기까지 한 것이 결국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워지게 하고, 놀랍게도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일에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방인들인 에베소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승전의 기념비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3절에서 자신이 죄수가 된 것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바울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한 바울의 여러 환난을 안 좋게 보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의 죄수가 된 것을 두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의 입지나, 교회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고관이 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죄수가 된 것이 좋게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여러 환난을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광으로 보도록 권면합니다. 이는 바울의 여러 환난을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바울이 죄수가 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방인을 위한 것이요,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죄수가 되었기 때문에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쓰시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바울의 여러 환난은 그들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을 통해서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로 소개하고, 이를 부연설명하기까지 한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결론을 통해, 자신이 갇힌 자가 되고 여러 환난이 있는 것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그들의 영광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뜻은 에베소 성도들이나, 우리나 다 바울이 죄수가 된 것을 영적으로 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의 뜻은 우리가 그가 죄수가 된 것을 영적으로 봄으로써,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거두신 승리를 보여주기 위한 참된 삶의 한 장면이요, 하나님께서 그의 각종 지혜로 이끄신 삶임을 알게 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실패요 패배였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절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 망쳐 놓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그 안에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교회를 낳고,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을 통해서 우리도 이 시대에서 복음을 위한 삶에서 영적인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광의 교회가 되기 위한 삶의 길과 전략의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하여는, 예수님을 위하여는 기꺼이 여러 환난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은 삶의 길입니다. 바울을 보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성령님에 붙잡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결국은 결박과 여러 환난을 겪으며, 로마의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 보니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 되었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선포하는 일에 쓰시는 삶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성도들의 삶에는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여러 환난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자녀를 교육하고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너무 벅찬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더하여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임을 알기에 참된 성도로 살고자 하고, 캠퍼스 영혼의 목자로서 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이런 우리의 삶이 참 팍팍하고 여유가 없는 삶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남들은 주말을 즐기고 여행을 즐기는 데,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양들을 위하여 마치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자처럼 사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들일 때는 이런 목자의 삶을 보며 낙심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목자가 되지 말아야지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우리의 삶을 다시 보고, 힘을 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성도로서의 삶,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비록 여러 환난이 있지만, 그것을 세상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되, 먼저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서 측량할 수 없는 예수님의 풍성함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요 복음의 일꾼으로 사는 우리의 삶에 비록 여러 환난이 있을지라도,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확신한 것 같이, 우리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양들의 영광이 될 것을 확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