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3강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 ②에베소의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말씀 / 에베소서 3:1-21
요절 / 에베소서 3:19 “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NIV)
에베소서는 은혜로운 한 구절을 떼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이해하는 데는 다소 어려운 말씀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듣고 배우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등산으로 치면 경사가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통해 정상에 이제 거의 가까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베소서 3장의 후편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 곧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말해줄 때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말해주고, 그들도 동일하게 그 내용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내용이 그들의 영적인 방향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은 여러 가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14-19절은 원래 관계접속사로 서로 연결된 긴 한 문장입니다. 마치 러시안 인형을 열면 그 안에 또 하나의 인형이 있고, 그 인형 안에 또 있고, 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수적인 설명을 빼고 요점만 추리면, 한 가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 한 가지는 에베소의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속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시도록 그들이 믿음을 통해서 마치 나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게 해달라고, 마치 건축물처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을 능히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설명하면, 그들이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아는 것을 능히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는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세워지게 해달라는 것도,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잘 알게 해달라는 것도 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신 뜻이요, 교회를 통해서 하시려는 궁극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난주에 이에 대한 설명을 오늘 후편 말씀 때로 미뤄둔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은 1:23에서 설명을 드린 것이기도 합니다. 1:23은 예수님을 두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하였을 때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는 기본적인 뜻이 ‘가득 채우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시고 능력으로 모세와 함께 하셨을 때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사람을 두고, 하나님께서 지혜로 충만하게 하신 사람 누구 누구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능력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후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능력의 역사를 이룰 때 이를 두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예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중에 함께 하시며 모든 일 가운데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행하시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이를 위해 로마의 감옥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에게 각각 이름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고 위대함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기의 처지에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교회의 절실한 필요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빌고 또 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의 성도들 곧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교회가 사람들의 뜻에 좌우되는 인간적인 모임이나, 세속적인 모임과는 차원이 다른 모임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능력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항상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모임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위대하신 능력과 그 긍휼의 풍성하심을 알게 하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까지 알게 하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 이하는 이런 교회가 되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속사람은 사람의 중심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무엘 16장의 신년 특강 말씀을 통하여 다윗에 대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인간적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은 그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약한 사람, 가장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윗을 두고 남자도 아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터에는 블레셋의 대군과 그들을 대변하는 장신의 거인 골리앗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과 맞서고 있는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다윗은 아직 남자 축에 끼지 못하는 풋내기였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의 막둥이였습니다. 마치 우리 중에 J.B.F의 하나와 같았습니다. 또한 직업적으로도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가운데 하나인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다윗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셨을 때, 다윗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 양의 새끼를 건져내고, 그것을 쳐 죽이는 담대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다 두려워 떨 때도, 다윗만은 두려워 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도전하여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다윗일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그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과 같이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이 이렇게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게 될 때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됨으로써 시작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17절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려면,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뿌리가 박히는 것은 살아있는 식물의 경우를 비유한 것입니다. 터가 굳어지는 것은 건축물이 반석과 같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시게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또한 로마서 8:32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계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서 결코 잊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 마음에서 빼앗을 수 없는 분으로 계시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성도는 강합니다. 그런 성도는 죄의 유혹 앞에서 고개를 젓고,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2세기에 로마의 박해로 순교한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죄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처형한 서머나의 총독이 폴리캅에게 한 번만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라고 부르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팔십 육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절대로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모독할 수 있는가?” 결국 그는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다윗이 그 마음에 사시는 하나님이 계셨던 것과 같이, 폴리캅의 그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시게 될 때, 그런 성도들은 속사람이 강건하게 됩니다. 죽음도 이기는 성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는 참 신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성도들이 속사람이 강건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시게 될 때, 그 결과로 성도들은 어떻게 하게 됩니까? 그것을 말하는 것이 18-19a절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와 같은 은혜의 결과로 인해 성도들이 능히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을 능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는 것을 능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속사람이 강한 사람, 그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확증이 바로 그의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 바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의 특징은 모든 일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지식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19a절은 그 정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넓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온 세상에, 모든 족속에게 다 미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길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에 사랑하시며, 영원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높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죄인들을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깊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배려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될 때,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 중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 폴리캅이 그러했듯이, 그런 순교의 자리에서조차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을 능히 하게 될 것입니다.
폴리캅은 체포된 후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와 총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맹수에게 던지겠다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맹수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악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선한 것을 회개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악한 세상에서 의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게는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자 총독이 “그대가 맹수들을 무시하니, 그대가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불에 타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여! 주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주께서 저를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마시고 수많은 주의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어가게 해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썩음을 입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것을 능히 하였습니다. 산채로 불태워지는 그 참혹한 화형을 ‘썩음을 입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깨닫고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일에 대해 주를 찬송하오며 주께 영광을 돌리옵니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에베소의 성도들의 교회를 위해 기도한 것은 교회가 바로 이러한 교회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은혜를 주셔야,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도록,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겪는 모든 일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는데 능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이 이루는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20절에서 보듯이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그의 위대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음 주 한 주간은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여 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이 시대에 우리를 교회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우리가 이를 위해 속사람이 참으로 강하게 해달라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닫는 것에서 내공이 있는 고수가 되고, 박사가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그런 점에서 준비되어져가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그는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대대로 영원무궁할 것임을 확신하기에 하는 고백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숫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들, 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이야기는 모든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영광을 받으신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시고 “회개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되, 어떤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외형이 어떠하든, 숫자가 어떠하든, 그런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를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뜻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이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속사람이 약한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는데서 부족한지, 얼마나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많이 차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나 작은 능력이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게 해 주소서” 간절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침 다음 한 주간은 봄학기를 준비하는 특.새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이런 기도를 드리며,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는 봄 학기를 다 준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에베소서 제3강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 ②에베소의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말씀 / 에베소서 3:1-21
요절 / 에베소서 3:19 “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NIV)
에베소서는 은혜로운 한 구절을 떼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이해하는 데는 다소 어려운 말씀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듣고 배우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등산으로 치면 경사가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통해 정상에 이제 거의 가까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베소서 3장의 후편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 곧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말해줄 때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말해주고, 그들도 동일하게 그 내용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내용이 그들의 영적인 방향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은 여러 가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14-19절은 원래 관계접속사로 서로 연결된 긴 한 문장입니다. 마치 러시안 인형을 열면 그 안에 또 하나의 인형이 있고, 그 인형 안에 또 있고, 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수적인 설명을 빼고 요점만 추리면, 한 가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 한 가지는 에베소의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속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시도록 그들이 믿음을 통해서 마치 나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게 해달라고, 마치 건축물처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을 능히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설명하면, 그들이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아는 것을 능히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는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세워지게 해달라는 것도,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잘 알게 해달라는 것도 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신 뜻이요, 교회를 통해서 하시려는 궁극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난주에 이에 대한 설명을 오늘 후편 말씀 때로 미뤄둔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은 1:23에서 설명을 드린 것이기도 합니다. 1:23은 예수님을 두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하였을 때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는 기본적인 뜻이 ‘가득 채우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시고 능력으로 모세와 함께 하셨을 때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사람을 두고, 하나님께서 지혜로 충만하게 하신 사람 누구 누구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능력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후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능력의 역사를 이룰 때 이를 두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예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중에 함께 하시며 모든 일 가운데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행하시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이를 위해 로마의 감옥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에게 각각 이름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고 위대함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기의 처지에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교회의 절실한 필요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빌고 또 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의 성도들 곧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교회가 사람들의 뜻에 좌우되는 인간적인 모임이나, 세속적인 모임과는 차원이 다른 모임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능력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항상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모임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위대하신 능력과 그 긍휼의 풍성하심을 알게 하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까지 알게 하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 이하는 이런 교회가 되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속사람은 사람의 중심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무엘 16장의 신년 특강 말씀을 통하여 다윗에 대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인간적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은 그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약한 사람, 가장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윗을 두고 남자도 아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터에는 블레셋의 대군과 그들을 대변하는 장신의 거인 골리앗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과 맞서고 있는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다윗은 아직 남자 축에 끼지 못하는 풋내기였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의 막둥이였습니다. 마치 우리 중에 J.B.F의 하나와 같았습니다. 또한 직업적으로도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가운데 하나인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다윗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셨을 때, 다윗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 양의 새끼를 건져내고, 그것을 쳐 죽이는 담대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다 두려워 떨 때도, 다윗만은 두려워 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도전하여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다윗일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그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과 같이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이 이렇게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게 될 때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됨으로써 시작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17절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려면,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뿌리가 박히는 것은 살아있는 식물의 경우를 비유한 것입니다. 터가 굳어지는 것은 건축물이 반석과 같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시게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또한 로마서 8:32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계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서 결코 잊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 마음에서 빼앗을 수 없는 분으로 계시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성도는 강합니다. 그런 성도는 죄의 유혹 앞에서 고개를 젓고,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2세기에 로마의 박해로 순교한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죄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처형한 서머나의 총독이 폴리캅에게 한 번만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라고 부르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팔십 육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절대로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모독할 수 있는가?” 결국 그는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다윗이 그 마음에 사시는 하나님이 계셨던 것과 같이, 폴리캅의 그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시게 될 때, 그런 성도들은 속사람이 강건하게 됩니다. 죽음도 이기는 성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는 참 신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성도들이 속사람이 강건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시게 될 때, 그 결과로 성도들은 어떻게 하게 됩니까? 그것을 말하는 것이 18-19a절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와 같은 은혜의 결과로 인해 성도들이 능히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을 능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는 것을 능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속사람이 강한 사람, 그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확증이 바로 그의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 바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의 특징은 모든 일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지식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19a절은 그 정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넓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온 세상에, 모든 족속에게 다 미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길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에 사랑하시며, 영원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높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죄인들을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깊이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배려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될 때,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 중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 폴리캅이 그러했듯이, 그런 순교의 자리에서조차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을 능히 하게 될 것입니다.
폴리캅은 체포된 후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와 총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맹수에게 던지겠다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맹수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악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선한 것을 회개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악한 세상에서 의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게는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자 총독이 “그대가 맹수들을 무시하니, 그대가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불에 타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여! 주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주께서 저를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마시고 수많은 주의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어가게 해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썩음을 입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것을 능히 하였습니다. 산채로 불태워지는 그 참혹한 화형을 ‘썩음을 입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깨닫고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일에 대해 주를 찬송하오며 주께 영광을 돌리옵니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에베소의 성도들의 교회를 위해 기도한 것은 교회가 바로 이러한 교회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은혜를 주셔야,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도록,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겪는 모든 일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는데 능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이 이루는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20절에서 보듯이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그의 위대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음 주 한 주간은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여 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이 시대에 우리를 교회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우리가 이를 위해 속사람이 참으로 강하게 해달라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닫는 것에서 내공이 있는 고수가 되고, 박사가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그런 점에서 준비되어져가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그는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대대로 영원무궁할 것임을 확신하기에 하는 고백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숫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들, 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이야기는 모든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영광을 받으신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시고 “회개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되, 어떤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외형이 어떠하든, 숫자가 어떠하든, 그런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를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뜻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이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속사람이 약한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는데서 부족한지, 얼마나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많이 차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나 작은 능력이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게 해 주소서” 간절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침 다음 한 주간은 봄학기를 준비하는 특.새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이런 기도를 드리며,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는 봄 학기를 다 준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