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4강
그에게까지 자라는 교회
말씀 / 에베소서 4:1-16
요절 /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Instead, speaking the truth in love, we will in all things grow up into him who is the Head, that is, Christ. NIV)
요즈음도 속을 시원하게 하는 일을 보면 ‘사이다맛’이라 하는 것을 보면 ‘사이다맛’의 시원함이 대단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탄산음료인 사이다가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은 운동 경기에 뛰는 선수들이나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이다 맛을 본 선수들이 경기를 뛰면서도 사이다 생각을 하느라 경기에 집중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선수가 ‘사이다에 신경 쓰면 되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는 또 다른 말로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으로, 무슨 일이든지 본질을 잊고, 딴 데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본질보다 사람들의 교제와 같이 다른 것에 신경을 더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예배 전 후에 예배나 말씀보다 점심 만들어 먹는 일에 신경이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경기이듯이, 교회가 집중해야 할 본질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즉 우리가 교회로서 잊지 말아야 할 본질,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베소서 1-3장에서 교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모퉁잇돌이 되신 그리스도 위에 영적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중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런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가 이 세상에서 운동선수들에게 경기와 같은, 정말 집중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를 두고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가리켜 소명(calling)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소명은 성도로서 한 개인에게도 중요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왜 사는가’라든지, ‘교회는 왜 있는가’라든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있고, 그것을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소명을 감당하는 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둘 수 있고, 모든 것을 이 소명을 위해 행하는 부르심 받은 자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순종하기 시작할 때, 그 일은 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일, 그래서 가장 힘써야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바로 한 개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며 산 인생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75세의 늙은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있고, 그것이 분명하였기에, 그의 인생은 그 후로 놀라운 새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복이 되는 소명, 땅의 모든 족속이 자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얻게 하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 소명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소명을 영접하고, 이런 소명을 합당하게 행하고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기꺼이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는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그가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자 했고, 마침내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고 위대하신 능력으로 함께 하신 인생이었고,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진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될 때, 그런 한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이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서가 항상 말씀하는 차원인 교회의 차원에서 볼 때,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은 무엇일까요? 또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그 소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이 이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바에 대해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일을 감당하는 참으로 복된 성도들이 되고, 우리의 교회가 되고자 소원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주 안에서 갇힌 자로서 에베소의 교회에 권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가 되기까지 하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온 그로서,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베소의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할 때, 교회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게 되고, 가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운 하나님이 뜻하시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사실 한 개인도, 한 교회도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거나, 그것에 연결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미가 없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상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는 에베소의 성도들에게는 부르심을 받은 일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당연히 다 알고 있고, 그래서 두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너무나 분명히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기록한 복음서의 끝에는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28:19,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은 16: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또 요한복음은 21:1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은 그 후편인 사도행전 1:8에서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예수님의 명령의 핵심은 전 세계 모든 만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명령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교회에 명령하신 전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대개 좁은 의미로 알고 있기 쉽습니다. 교회의 여러 일 중에서 복음을 전하는 초기 단계의 일에 대해 전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전도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성경 공부를 소개하고 권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해 예수님을 안 믿는 한 사람을 믿게 하는 것,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하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에서 보면 예수님은 전도를 명령하시되,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보면, 하나님이 뜻하시는 교회를 이루는 것까지 포함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한 마디로 한다면, 이런 넓은 의미의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전도의 일을 통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까지 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왜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때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일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 곧 전도의 일을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교회로서의 미래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교회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딴 짓을 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건물에 비유한다면 짓다가 만 건물이 되고, 주인이 뜻한 용도와 상관없이 사용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작년 1월 23일에 연합뉴스가 ‘문 닫는 유럽 교회들... 옷가게, 체육관, 술집으로 변신’이라는 기사를 보도한 것을 스크랩을 해 둔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기사에는 유럽의 교회들이 신도 수 격감으로 문을 닫으면서, 텅 빈 교회 건물들이 '세속적'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며,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여러 사례를 언급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아넴의 ‘성 조지프 교회’는 한때 1천 명이 예배하는 도시의 구심점이었으나 지금은 스케이트보드 연습장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10년간 문을 닫은 가톨릭교회 건물이 전체 1천 600곳 가운데 3분의 2라고 하였습니다. 개신교 교회도 이런 추세는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앞으로 문 닫는 교회가 4년간 700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도 하였습니다. 영국은 연평균 20여 곳의 성공회 교회가 폐쇄되고 있고, 독일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515곳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런 교회의 건물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허물기보다는 용도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주로 상업적인 용도로 전환한다고 하였습니다. 영국 브리스톨의 세인트폴 교회 건물은 서커스 훈련 학교가 됐는데, 그 이유가 학교 측이 공중 곡예 연습에 적합한 환경을 찾다가 교회의 높은 천장을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뿌리에 있는 일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염려한 일이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오늘 본문에서 권면하는 일이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런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를 말씀해 주십니다. 2절에서 보면, 그것은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일을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행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면서 행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힘쓰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한 말씀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줄로 맨다는 것은 마치 죄수들이 이동을 할 때 포승줄로 함께 묶는 것을 비유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성도들이 평안을 산출하는 그런 줄에 함께 묶여 있듯이 평안한 가운데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성령님께서 1절에서 말한 ‘부르심을 받은 일’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행전 1:8에서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시는 가장 큰 이유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교회로 하여금 이런 하나의 소명을 지키고 감당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명령하신 일이요, 넓은 의미의 ‘전도’임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어떤 분란이 없이, 마치 평안이 나오는 그런 줄에 묶인 것처럼 평안한 가운데서,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오직 하나인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4-6절까지는 7가지의 하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이 오직 하나인 이유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며,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도 한 분이며,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 또한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많은 교회들은 다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한 분이신 성령님은 하나인 교회가 하나의 소명을 지켜나가고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한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의 소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로서, 만유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점에서 하나로 통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교회의 소명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소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은 것이 있어 보여도, 모든 일은 이 하나의 소명에 따르는 일입니다.
7절 이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교회가 이런 하나인 소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주신 선물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 분량을 정해주신 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8,9절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것은 성경 곧 구약 성경의 성취임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 시편 68편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승리를 거두신 후에 하시는 일이 높은 자리에 오르시고 자기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시편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복을 내릴 것을 말한 것이었음을 여기서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묻히심으로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다시 하늘 위에 오르셨습니다.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곧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11절에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지체 중에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교회를 위해 주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는 1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이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역할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각자 지체로서의 기능을 하게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소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견고하게 서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서 구단과 구단주가 있고, 구단주가 임명하는 감독과 코치진이 하는 역할과 같습니다. 교회도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이 모임을 이루고 무엇인가를 행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교회에게 하나의 소명을 주시고, 이런 하나의 소명을 합당하게 감당하게 하시고자 영적인 지도자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일을 맡게 하십니다.
13절 이하는 이런 지도자들의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로까지 온전해져 가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들이 되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아, 예수님의 충만한 수준까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도들이 성숙한 성도들로 성장하게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성도들이 성숙한 성도들이 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세상의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알고 잘 배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른 성숙한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그런 유혹에 빠져들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문제 이단인 신천지의 숫자가 15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거의 대부분이 일반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신천지와 같은 거짓 집단이 없는데, 왜 그런 이단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까?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알고,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 중에는 이런 이단뿐 만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다단계와 같은 피라미드 조직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온갖 교훈의 풍조, 이념과 주장에 빠져 이리저리 밀리고 요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조금만 지나고 나면 그렇고 그런 세상의 유행일 뿐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헛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입니다. 이 일은 다른 모든 일과 다른 절대적인 일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의미와 가치가 있게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로서 부르심 받은 일, 오직 하나인 소명을 행하되, 그것을 지키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알고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한 개인인 성도로서만이 아니라, 그런 성도들이 이루는 교회로서도 이 세상 속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하신 것과 같이, 교회는 이 세상에서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존재와 하는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한 마디로 전도의 일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명하신 전도의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 좁은 의미의 전도의 일, 구제와 봉사, 교육과 훈련, 공의와 정의의 실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소명인 넓은 의미의 전도를 위하여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세상 속에서는 각자 다른 위치에 있고, 교회에서도 지체로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우리는 어떤 위치와 자리에 있든지, 기독교 정치인, 기독교 경제인, 기독교 교사, 기독교 가정, 기독교 학생 등 어떤 위치와 자리에 있든지 모든 일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기 위한 것에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공부하고, 이를 위해 돈을 벌고, 이를 위해 활동하고자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 진리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함으로, 예수님을 대변하고,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는 성도들이 합심동역하여 전도의 일, 오직 하나의 소명을 합당하게 행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그런 곳이 됩니다. 성장하는 교회, 굳게 서 있는 그런 교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가운데, 에베소의 성도들의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간곡히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 오직 하나 뿐인 소명을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그 소명을 지키기를 힘쓰는 교회가 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일을 잘 감당할 때 성도들은 세상을 이기는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대변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로서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 부르심을 받은 오직 하나의 일을 지키기를 힘쓰는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분량대로 주신 은혜를 따라서, 그 기능과 역할을 잘 행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믿고 알고 배우는 일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로서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나 교회를 선줄로 여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우리가 교회로서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하는 데서, 그에게까지 자라는 교회가 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가를 절실히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더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감당하고, 이 소명을 지키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가 캠퍼스 영혼들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제4강
그에게까지 자라는 교회
말씀 / 에베소서 4:1-16
요절 /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Instead, speaking the truth in love, we will in all things grow up into him who is the Head, that is, Christ. NIV)
요즈음도 속을 시원하게 하는 일을 보면 ‘사이다맛’이라 하는 것을 보면 ‘사이다맛’의 시원함이 대단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탄산음료인 사이다가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은 운동 경기에 뛰는 선수들이나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이다 맛을 본 선수들이 경기를 뛰면서도 사이다 생각을 하느라 경기에 집중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선수가 ‘사이다에 신경 쓰면 되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는 또 다른 말로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으로, 무슨 일이든지 본질을 잊고, 딴 데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본질보다 사람들의 교제와 같이 다른 것에 신경을 더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예배 전 후에 예배나 말씀보다 점심 만들어 먹는 일에 신경이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경기이듯이, 교회가 집중해야 할 본질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즉 우리가 교회로서 잊지 말아야 할 본질,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베소서 1-3장에서 교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모퉁잇돌이 되신 그리스도 위에 영적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중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런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가 이 세상에서 운동선수들에게 경기와 같은, 정말 집중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를 두고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가리켜 소명(calling)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소명은 성도로서 한 개인에게도 중요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왜 사는가’라든지, ‘교회는 왜 있는가’라든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있고, 그것을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소명을 감당하는 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둘 수 있고, 모든 것을 이 소명을 위해 행하는 부르심 받은 자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순종하기 시작할 때, 그 일은 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일, 그래서 가장 힘써야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바로 한 개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며 산 인생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75세의 늙은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있고, 그것이 분명하였기에, 그의 인생은 그 후로 놀라운 새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복이 되는 소명, 땅의 모든 족속이 자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얻게 하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 소명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소명을 영접하고, 이런 소명을 합당하게 행하고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기꺼이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는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그가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자 했고, 마침내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고 위대하신 능력으로 함께 하신 인생이었고,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진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될 때, 그런 한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이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서가 항상 말씀하는 차원인 교회의 차원에서 볼 때,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은 무엇일까요? 또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그 소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이 이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바에 대해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일을 감당하는 참으로 복된 성도들이 되고, 우리의 교회가 되고자 소원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주 안에서 갇힌 자로서 에베소의 교회에 권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가 되기까지 하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온 그로서,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베소의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할 때, 교회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게 되고, 가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운 하나님이 뜻하시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사실 한 개인도, 한 교회도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거나, 그것에 연결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미가 없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상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는 에베소의 성도들에게는 부르심을 받은 일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당연히 다 알고 있고, 그래서 두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너무나 분명히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기록한 복음서의 끝에는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28:19,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은 16: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또 요한복음은 21:1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은 그 후편인 사도행전 1:8에서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예수님의 명령의 핵심은 전 세계 모든 만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명령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교회에 명령하신 전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대개 좁은 의미로 알고 있기 쉽습니다. 교회의 여러 일 중에서 복음을 전하는 초기 단계의 일에 대해 전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전도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성경 공부를 소개하고 권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해 예수님을 안 믿는 한 사람을 믿게 하는 것,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하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에서 보면 예수님은 전도를 명령하시되,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보면, 하나님이 뜻하시는 교회를 이루는 것까지 포함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한 마디로 한다면, 이런 넓은 의미의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전도의 일을 통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까지 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왜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때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일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 곧 전도의 일을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교회로서의 미래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교회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딴 짓을 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건물에 비유한다면 짓다가 만 건물이 되고, 주인이 뜻한 용도와 상관없이 사용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작년 1월 23일에 연합뉴스가 ‘문 닫는 유럽 교회들... 옷가게, 체육관, 술집으로 변신’이라는 기사를 보도한 것을 스크랩을 해 둔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기사에는 유럽의 교회들이 신도 수 격감으로 문을 닫으면서, 텅 빈 교회 건물들이 '세속적'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며,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여러 사례를 언급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아넴의 ‘성 조지프 교회’는 한때 1천 명이 예배하는 도시의 구심점이었으나 지금은 스케이트보드 연습장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10년간 문을 닫은 가톨릭교회 건물이 전체 1천 600곳 가운데 3분의 2라고 하였습니다. 개신교 교회도 이런 추세는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앞으로 문 닫는 교회가 4년간 700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도 하였습니다. 영국은 연평균 20여 곳의 성공회 교회가 폐쇄되고 있고, 독일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515곳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런 교회의 건물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허물기보다는 용도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주로 상업적인 용도로 전환한다고 하였습니다. 영국 브리스톨의 세인트폴 교회 건물은 서커스 훈련 학교가 됐는데, 그 이유가 학교 측이 공중 곡예 연습에 적합한 환경을 찾다가 교회의 높은 천장을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뿌리에 있는 일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염려한 일이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오늘 본문에서 권면하는 일이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런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를 말씀해 주십니다. 2절에서 보면, 그것은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일을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행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면서 행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힘쓰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한 말씀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줄로 맨다는 것은 마치 죄수들이 이동을 할 때 포승줄로 함께 묶는 것을 비유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성도들이 평안을 산출하는 그런 줄에 함께 묶여 있듯이 평안한 가운데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성령님께서 1절에서 말한 ‘부르심을 받은 일’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행전 1:8에서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시는 가장 큰 이유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교회로 하여금 이런 하나의 소명을 지키고 감당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명령하신 일이요, 넓은 의미의 ‘전도’임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어떤 분란이 없이, 마치 평안이 나오는 그런 줄에 묶인 것처럼 평안한 가운데서,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오직 하나인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4-6절까지는 7가지의 하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이 오직 하나인 이유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며,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도 한 분이며,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 또한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많은 교회들은 다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한 분이신 성령님은 하나인 교회가 하나의 소명을 지켜나가고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한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의 소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로서, 만유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점에서 하나로 통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교회의 소명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소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은 것이 있어 보여도, 모든 일은 이 하나의 소명에 따르는 일입니다.
7절 이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교회가 이런 하나인 소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주신 선물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 분량을 정해주신 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8,9절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것은 성경 곧 구약 성경의 성취임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 시편 68편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승리를 거두신 후에 하시는 일이 높은 자리에 오르시고 자기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시편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복을 내릴 것을 말한 것이었음을 여기서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묻히심으로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다시 하늘 위에 오르셨습니다.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곧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11절에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지체 중에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교회를 위해 주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는 1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이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역할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각자 지체로서의 기능을 하게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소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견고하게 서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서 구단과 구단주가 있고, 구단주가 임명하는 감독과 코치진이 하는 역할과 같습니다. 교회도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이 모임을 이루고 무엇인가를 행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교회에게 하나의 소명을 주시고, 이런 하나의 소명을 합당하게 감당하게 하시고자 영적인 지도자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일을 맡게 하십니다.
13절 이하는 이런 지도자들의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로까지 온전해져 가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들이 되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아, 예수님의 충만한 수준까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도들이 성숙한 성도들로 성장하게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성도들이 성숙한 성도들이 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세상의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알고 잘 배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른 성숙한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그런 유혹에 빠져들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문제 이단인 신천지의 숫자가 15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거의 대부분이 일반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신천지와 같은 거짓 집단이 없는데, 왜 그런 이단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까?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알고,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 중에는 이런 이단뿐 만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다단계와 같은 피라미드 조직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온갖 교훈의 풍조, 이념과 주장에 빠져 이리저리 밀리고 요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조금만 지나고 나면 그렇고 그런 세상의 유행일 뿐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헛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입니다. 이 일은 다른 모든 일과 다른 절대적인 일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의미와 가치가 있게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로서 부르심 받은 일, 오직 하나인 소명을 행하되, 그것을 지키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알고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한 개인인 성도로서만이 아니라, 그런 성도들이 이루는 교회로서도 이 세상 속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하신 것과 같이, 교회는 이 세상에서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존재와 하는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한 마디로 전도의 일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명하신 전도의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 좁은 의미의 전도의 일, 구제와 봉사, 교육과 훈련, 공의와 정의의 실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소명인 넓은 의미의 전도를 위하여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세상 속에서는 각자 다른 위치에 있고, 교회에서도 지체로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우리는 어떤 위치와 자리에 있든지, 기독교 정치인, 기독교 경제인, 기독교 교사, 기독교 가정, 기독교 학생 등 어떤 위치와 자리에 있든지 모든 일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하기 위한 것에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공부하고, 이를 위해 돈을 벌고, 이를 위해 활동하고자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 진리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함으로, 예수님을 대변하고,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는 성도들이 합심동역하여 전도의 일, 오직 하나의 소명을 합당하게 행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그런 곳이 됩니다. 성장하는 교회, 굳게 서 있는 그런 교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가운데, 에베소의 성도들의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간곡히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 오직 하나 뿐인 소명을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그 소명을 지키기를 힘쓰는 교회가 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일을 잘 감당할 때 성도들은 세상을 이기는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대변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로서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 부르심을 받은 오직 하나의 일을 지키기를 힘쓰는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분량대로 주신 은혜를 따라서, 그 기능과 역할을 잘 행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믿고 알고 배우는 일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로서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나 교회를 선줄로 여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우리가 교회로서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행하는 데서, 그에게까지 자라는 교회가 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가를 절실히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더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감당하고, 이 소명을 지키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가 캠퍼스 영혼들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