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5강
새 사람의 삶으로 변화되는 공동체
말씀 / 에베소서 4:17-32
요절 /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NIV)
우리는 지난 주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 곧 소명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넓은 의미의 전도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성도들이 서로 지체가 된 자신을 깨닫고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 전에 어떤 분의 인생소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U.B.F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후배에게 예수님을 전해주고자 하는 소원을 품고, 한 아끼는 후배를 다방에 불러내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당시는 아직 성도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데까지 삶이 바뀌지는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후배 앞에서 평소처럼 담배를 꼬나 물고 열심히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랬는데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후배가 말하기를, 언니의 말은 참 좋은 데, 언니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니까 언니를 따라 믿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말이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분은 이것이 성도로서 새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성도로서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언한다고 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이방인 곧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듯이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람을 나눌 때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람을 나눌 때, 신자와 비신자로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이방인의 삶은 특징을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헛되고 공허한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했지만 남는 것이 없을 때, 열매가 없을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결코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도 순간순간은 만족과 기쁨을 맛보며, 이런 저런 결과를 얻고 하는 일에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결산해보면 남는 것이 없고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허무와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 이렇게 허망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까? 이들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창조목적과 뜻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근본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등의 근본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정녕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때그때는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인가를 하지만, 죽음 앞에서 보면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장의 현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에 시달리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스위스 심리학자 융이 잘 말하기를 “현대인의 근본적인 심리의 병은 공허감이다. 만사가 무의미하다는 느낌이다”라고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어떤 분이 외대역에서 센타로 전화를 해서 친구를 소개하려고 하니 좀 와 줄 수 있느냐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신천지’가 센타 사람을 유인해 내고자 함인가 오해를 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확인한 후에 가서 보니, 전에 중앙 센타에서 성경공부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분이 공익 근무를 하면서 만난 후임이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도움을 받게 하고자 데려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외대역까지는 왔는데 개찰구 밖으로 나오지는 않고 버티고 있어서 몇 시간 째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요기도회 후에 외대역 안으로 들어가서, 벤치에 앉아 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에게 무엇이 도움이 필요한 지를 물으니 딱 한 마디를 하기를 ‘나를 찾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형제의 자세한 사정은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쩌면 이 경우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가운데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들은 근본진리에 대한 무지함과 함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총명 곧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같이 지식은 참으로 많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생이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도 점점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방탕에 던져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기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삶의 뚜렷한 기준이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포스트모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고 하며, 절대적인 가치관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며,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며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한글 메시지 성경은 ‘성에 집착하고, 온갖 종류의 변태적인 행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부터는 더 이상 이방인이 이와 같이 행하듯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에베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그렇게 이방인이 행하듯이 행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21절에서와 같이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2절이 말씀하듯이, 그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 그런 후에 23-24절과 같이 그들은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9:9-10절에 보면 바울은 만 2년 동안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날마다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때의 일에 대해 사도행전 20:19-21절에서 말하기를 모든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면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못 배워서 그랬다는 핑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배운 사람들로서, 이방인이었던 때의 생활 방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속속들이 썩었기 때문에 내다 버리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옷을 비유로 하여,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신분이 변하면 옷도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 사무엘이 군인으로 신분이 바뀐 후 이제 군대에서 홈페이지나 밴드에 올리는 모든 사진은 군복을 입은 사진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 죄수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면 죄수복을 벗고 일반인이 입는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서부터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내면에 진리 안에서 의로움과 거룩함 등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성도들은 이런 하나님을 따라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진리 안에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다른 말로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12-13에서 이런 회개의 내용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는 금년 우리의 영적인 방향이기도 한 중심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심이 있는 사람이란 마음의 중심에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의 새로운 삶을 사는 데는 중심에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기 전에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죄 앞에 한없이 약한 자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죄악 된 본성에 순종하여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중심이 바뀌게 됩니다.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그들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에게 그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회개를 통해 중심이 있는 사람, 중심이 바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중심이 바뀔 때, 그 사람은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25-32절은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의 삶의 방식과 갈아입어야 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실제적인 지침들은 성도들이 자신을 교회의 지체임을 알고, 지체로서 다른 지체를 위하여 서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이는 25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두고, 이는 우리가 지체가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4세기의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서, 황금의 입이라고 불릴 정도로 설교를 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25절을 재미있는 비유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는 “눈은 발에 대해 거짓말하지 못하고, 또한 발은 눈에 대해서도 거짓말하지 못한다. 만약 깊은 수렁이 있고 그 입구가 갈대로 덮여 있어 눈에 보이기를 단단한 땅으로 보인다면 눈이 발을 사용해서 밑이 비어 있는지 혹은 튼튼하여 발을 디딜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겠느냐? 또 만약 눈이 뱀이나 야생 동물의 위험을 관찰하게 되면 눈이 발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서로 간에 없는 일을 지어내어 말하거나, 있는 일을 숨기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공동체 속에 불신이 생기거나 오해와 다툼, 갈등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간에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따라서 말해야 합니다.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을 회개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26,27절에서는 성도들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과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를 세우고자 할 때, 현실적으로는 갈등이 생기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생기고, 마음에 안 드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이 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분을 내게 되었더라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짓밟는 죄를 짓지는 않아야 합니다. 또 하루를 넘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잘못 분을 낼 때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되고, 마귀가 그것을 이용해 공동체의 합심동역을 깨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절은 성도들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두고, 이는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기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들은 물질생활도 다른 지체를 섬기는 것이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또 29절은 성도들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야 하는 이유를 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이 되기 위하여 이고, 은혜를 끼치게하기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에서 말처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말에서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말은 많은데, 다른 지체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은혜가 되지도 못하다면 안하니 만 못합니다. 옛 사람이 술에 취해 말하듯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자기 속을 풀려는 사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들어 주는 사람은 속이 막히게 됩니다. 사람의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보약이 될 수도 있고, 상처를 주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잔인한 말 한마디는 작아보여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가치 돋친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무책임하게 지어낸 말이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3:6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말에서도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책은 이에 대해 말을 많이 하기보다 들어주는 사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런 가운데 한 마디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말을 할 때 가장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말을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말 한 마디로 사람을 돕고 살리셨듯이, 사람을 살리고 돕는 말을 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상에서처럼 성도들이 새 사람의 새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도는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의지하며 위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말이 변하고, 내면이 변하고, 물질생활의 자세도 변해야 합니다. 이런 새 생활을 배우고 익힐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함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고 거하게 하신 것이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놓으신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지만, 아직 몸을 가지고 있기에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 몸의 구원이 부활의 몸을 입음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는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님은 우리가 구원 받은 자 답지 못하게 더러운 말을 할 때 우리 안에서 고통 하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거룩한 성령님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됩니다. 또한, 31-32절과 같이, 성도들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어떤 새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다른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던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배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우리도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로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예수님을 배움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말이 바뀌고, 내면이 바뀌고, 물질생활의 차원이 바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참된 것을 말하며, 분을 억제하고 인내하며, 열심히 일하여 선한 일을 하며, 덕을 세우는데 선한 말을 하며, 서로 친절을 베풀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크신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셔서 우리 모두가 새 사람의 새 삶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계속 일어나게 해 주시고, 이 시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에베소서 제5강
새 사람의 삶으로 변화되는 공동체
말씀 / 에베소서 4:17-32
요절 /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NIV)
우리는 지난 주 교회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 곧 소명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넓은 의미의 전도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성도들이 서로 지체가 된 자신을 깨닫고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 전에 어떤 분의 인생소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U.B.F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후배에게 예수님을 전해주고자 하는 소원을 품고, 한 아끼는 후배를 다방에 불러내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당시는 아직 성도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데까지 삶이 바뀌지는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후배 앞에서 평소처럼 담배를 꼬나 물고 열심히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랬는데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후배가 말하기를, 언니의 말은 참 좋은 데, 언니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니까 언니를 따라 믿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말이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분은 이것이 성도로서 새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성도로서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언한다고 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이방인 곧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듯이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람을 나눌 때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람을 나눌 때, 신자와 비신자로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이방인의 삶은 특징을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헛되고 공허한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했지만 남는 것이 없을 때, 열매가 없을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결코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도 순간순간은 만족과 기쁨을 맛보며, 이런 저런 결과를 얻고 하는 일에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결산해보면 남는 것이 없고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허무와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 이렇게 허망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까? 이들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창조목적과 뜻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근본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등의 근본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정녕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때그때는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인가를 하지만, 죽음 앞에서 보면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장의 현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에 시달리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스위스 심리학자 융이 잘 말하기를 “현대인의 근본적인 심리의 병은 공허감이다. 만사가 무의미하다는 느낌이다”라고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어떤 분이 외대역에서 센타로 전화를 해서 친구를 소개하려고 하니 좀 와 줄 수 있느냐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신천지’가 센타 사람을 유인해 내고자 함인가 오해를 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확인한 후에 가서 보니, 전에 중앙 센타에서 성경공부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분이 공익 근무를 하면서 만난 후임이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도움을 받게 하고자 데려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외대역까지는 왔는데 개찰구 밖으로 나오지는 않고 버티고 있어서 몇 시간 째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요기도회 후에 외대역 안으로 들어가서, 벤치에 앉아 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에게 무엇이 도움이 필요한 지를 물으니 딱 한 마디를 하기를 ‘나를 찾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형제의 자세한 사정은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쩌면 이 경우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가운데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들은 근본진리에 대한 무지함과 함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총명 곧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같이 지식은 참으로 많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생이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도 점점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방탕에 던져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기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삶의 뚜렷한 기준이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포스트모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고 하며, 절대적인 가치관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며,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며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한글 메시지 성경은 ‘성에 집착하고, 온갖 종류의 변태적인 행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부터는 더 이상 이방인이 이와 같이 행하듯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에베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그렇게 이방인이 행하듯이 행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21절에서와 같이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2절이 말씀하듯이, 그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 그런 후에 23-24절과 같이 그들은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9:9-10절에 보면 바울은 만 2년 동안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날마다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때의 일에 대해 사도행전 20:19-21절에서 말하기를 모든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면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못 배워서 그랬다는 핑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배운 사람들로서, 이방인이었던 때의 생활 방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속속들이 썩었기 때문에 내다 버리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옷을 비유로 하여,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신분이 변하면 옷도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 사무엘이 군인으로 신분이 바뀐 후 이제 군대에서 홈페이지나 밴드에 올리는 모든 사진은 군복을 입은 사진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 죄수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면 죄수복을 벗고 일반인이 입는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서부터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내면에 진리 안에서 의로움과 거룩함 등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성도들은 이런 하나님을 따라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진리 안에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다른 말로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12-13에서 이런 회개의 내용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는 금년 우리의 영적인 방향이기도 한 중심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심이 있는 사람이란 마음의 중심에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의 새로운 삶을 사는 데는 중심에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기 전에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죄 앞에 한없이 약한 자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죄악 된 본성에 순종하여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중심이 바뀌게 됩니다.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그들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에게 그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회개를 통해 중심이 있는 사람, 중심이 바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중심이 바뀔 때, 그 사람은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25-32절은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의 삶의 방식과 갈아입어야 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실제적인 지침들은 성도들이 자신을 교회의 지체임을 알고, 지체로서 다른 지체를 위하여 서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이는 25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두고, 이는 우리가 지체가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4세기의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서, 황금의 입이라고 불릴 정도로 설교를 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25절을 재미있는 비유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는 “눈은 발에 대해 거짓말하지 못하고, 또한 발은 눈에 대해서도 거짓말하지 못한다. 만약 깊은 수렁이 있고 그 입구가 갈대로 덮여 있어 눈에 보이기를 단단한 땅으로 보인다면 눈이 발을 사용해서 밑이 비어 있는지 혹은 튼튼하여 발을 디딜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겠느냐? 또 만약 눈이 뱀이나 야생 동물의 위험을 관찰하게 되면 눈이 발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서로 간에 없는 일을 지어내어 말하거나, 있는 일을 숨기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공동체 속에 불신이 생기거나 오해와 다툼, 갈등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간에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따라서 말해야 합니다.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을 회개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26,27절에서는 성도들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과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를 세우고자 할 때, 현실적으로는 갈등이 생기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생기고, 마음에 안 드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이 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분을 내게 되었더라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짓밟는 죄를 짓지는 않아야 합니다. 또 하루를 넘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잘못 분을 낼 때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되고, 마귀가 그것을 이용해 공동체의 합심동역을 깨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절은 성도들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두고, 이는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기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들은 물질생활도 다른 지체를 섬기는 것이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또 29절은 성도들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야 하는 이유를 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이 되기 위하여 이고, 은혜를 끼치게하기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에서 말처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말에서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말은 많은데, 다른 지체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은혜가 되지도 못하다면 안하니 만 못합니다. 옛 사람이 술에 취해 말하듯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자기 속을 풀려는 사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들어 주는 사람은 속이 막히게 됩니다. 사람의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보약이 될 수도 있고, 상처를 주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잔인한 말 한마디는 작아보여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가치 돋친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무책임하게 지어낸 말이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3:6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말에서도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책은 이에 대해 말을 많이 하기보다 들어주는 사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런 가운데 한 마디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말을 할 때 가장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말을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말 한 마디로 사람을 돕고 살리셨듯이, 사람을 살리고 돕는 말을 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상에서처럼 성도들이 새 사람의 새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도는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의지하며 위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말이 변하고, 내면이 변하고, 물질생활의 자세도 변해야 합니다. 이런 새 생활을 배우고 익힐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함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고 거하게 하신 것이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놓으신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지만, 아직 몸을 가지고 있기에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 몸의 구원이 부활의 몸을 입음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는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님은 우리가 구원 받은 자 답지 못하게 더러운 말을 할 때 우리 안에서 고통 하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거룩한 성령님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됩니다. 또한, 31-32절과 같이, 성도들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어떤 새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다른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던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배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우리도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로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예수님을 배움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말이 바뀌고, 내면이 바뀌고, 물질생활의 차원이 바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참된 것을 말하며, 분을 억제하고 인내하며, 열심히 일하여 선한 일을 하며, 덕을 세우는데 선한 말을 하며, 서로 친절을 베풀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크신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셔서 우리 모두가 새 사람의 새 삶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계속 일어나게 해 주시고, 이 시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합당하게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