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6강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공동체
말씀 / 에베소서 5:1-20
요절 /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For you were once 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Live as children of light. NIV)
오늘 말씀은 교회가 주변의 문화, 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어떤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칫 높아져서 세상을 비난하고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이 죄 아래 신음하는 약하고 상처받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변화되도록 섬기는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위해 어떤 연기를 펼쳐야 할까요? 얼마 전에는 ‘응답하라 1988’이, 요즈음은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인기 짱’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인공들의 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상의 이야기를 연기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혼신의 연기를 펼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역할을 연기할 때, 어떻게 연기해야 마땅할까요?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교회가 빛의 자녀들의 삶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이를 통해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교회가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삶을 살 때 대원칙과 같은 방향이 있습니다. 1-2a절은 바로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러므로’란 4장 후반부에서 말씀한 것을 받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새 사람으로서 살아야 함으로, 그러므로’란 말입니다. 새 사람이란 두 가지 정체성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고,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이므로 예수님이 명하신 새 계명에 순종해야 됩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옛 어른들의 말이 정말 맞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8:44). 자녀는 부모가 하는 행동이 좋든 나쁘든 그대로 배우고 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하게 되겠습니까?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게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요한복음 13:34에서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그린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녀라면, 또한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사는 제자라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3절 말씀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교회 공동체 중에서는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더럽고 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과 말은 자신과 남을 모두 해치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은 우리가 만일 무슨 말을 해야 한다면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로서 왜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바입니까? 성도라면 틀림없이 이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21:8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6:9-10에서도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정녕 알고 있다면, 성도로서 마땅하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헛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말을 말합니다. 헛된 말의 역사는 사탄이 시작한 것입니다. 헛된 말의 포장지는 아름다울 수 있고, 달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탐욕을 부추기고, 탐욕을 하나님 대신 섬기는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뱀을 이용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요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헛된 말은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죄를 짓게 만들었고, 죽음의 저주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헛된 말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금하시는 동성애를 여러 가지 이론으로 합리화 하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말일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누구든지 이런 헛된 말로 자신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속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든지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입니다. 바로 알고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성경공부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오늘과 같이 주일말씀을 듣는 것, 소감을 쓰는 것,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둔 말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이 점에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를 아는 것과, 우리 마음에 붙잡아 둔 말씀, 새겨둔 말씀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는 축구나 테니스를 이론적으로 잘 아는 것과,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혀 실력을 키우는 것이 전혀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경을 안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말씀을 새기고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며 붙잡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내 마음에 없으면, 사탄이 무슨 말로 속여도 속이는 줄도 모른 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론만 알지 실기 연습이 안 된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실전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공부한 것도 잊어버리기를 잘 합니다. 거기에다 성경은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다 공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분량이 방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겸손히 때마다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성도들은 새 사람으로서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빛의 일을 해야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라는 영적 어두움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9절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빛의 자녀로서 사는 것은 선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란 뜻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선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정의롭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그런 착함과 의로움이 한 때의 것이 아니요 평생의 것이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과 위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렇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으려면, 10절이 말씀하는 대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아야 합니다.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일일지라도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자기가 있으면 그는 실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거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직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을 때 그 행하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주변의 세상에 변화의 역사를 이루는 역할을 하고자 할 때,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입니다. 성도들이 빛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도 다른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어둠 가운데 행하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일,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일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해 주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마치 태양이 그 빛을 온 세상에 비추어야만 이루어지는 일들과 같습니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는 일, 죽은 듯 보이던 마른 가지에서 개나리와 목련화가 피어나고, 캠퍼스를 아름답게 하는 일은 태양이 그 빛을 비추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구원의 역사, 변화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해 주셔야 이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하고,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태양이 그 빛을 비출 때 온 세상에 위대한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듯이, 성도들이 빛의 자녀들처럼 삶으로써 비추는 빛이 그런 생명과 변화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11절에서와 같이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고수하는 것을 통해 도리어 그런 어둠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다. 책망하는 것은 드러내고 폭로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지 말로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을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의 어두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두움의 일은 빛의 일을 통해서 대조가 될 때 반드시 어둠의 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극적으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14절은 이사야 60:1에 기초한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를 내다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일어나 빛을 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빛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14절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이 잠자는 자처럼, 죽음 자처럼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자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빛을 비추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12월 31일 새해를 앞둔 자정에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한 남자가 자동소총을 들고 송구영신 예배 중인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가 총기참사의 자리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 닥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목사님이 침착하게 그에게 다가가 ‘네가 도와줄까요?’ 한 마디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 하며 안정을 찾게 되고 참사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사실 가장 먼저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이 닥칠 수도 있는 순간에도 모든 착함으로 한 사람을 선대하였습니다. 저라면 과연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게는 그 사건은 빛의 자녀가 발한 작은 빛이 한 순간에 어둠을 책망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이룬 역사로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빛의 자녀로서의 삶에는 그가 발하는 빛으로 세상을 책망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 빛을 발하는 것은 15절에서와 같이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해야 됩니다. 여기서 지혜란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력, 분별력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이런 지혜 있는 자가 될 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16절이 명령하는 일입니다. 16절은 그 일을 두고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낀다는 단어는 시간을 아낀다고 할 때 쓰이는 그런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속량하신다’고 할 때의 ‘속량하다’는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을 속량하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슨 말인지를 쉽게 다가오는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풀어서 말하면, 결정적인 어떤 순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써 행함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빛을 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앞에서 예를 든 사건에서 목사님이 자동소총을 든 사람을 발견한 그 순간에 한 일과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런 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위험합니다. 엎드리세요, 피하십시오’ 하며, 자신도 강대상 뒤로 몸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순간에 어떻게 하느냐는 참으로 분별력,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예수님이 하신 일에서 가장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은 여자를 거칠게 끌고 들어와 예수님 앞에 세우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사납게 묻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해야 하는 순간이요,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않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빛을 발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고,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여자를 죽음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는 말씀이 뜻하는 그런 일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을 아끼는’ 일은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긴박한 순간, 두 번 다시 반복해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평소에 해야 하는 일이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요, 기도하는 일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결코 참된 지혜가 있는 자, 세월을 아끼고, 속량하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 있는 자,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그런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세월을 아끼는 일, 곧 속량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긴박하여 침 삼킬 시간 동안의 짧은 순간에 ‘주여’ 하며 순간의 기도 밖에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되 우리 안에 이미 있는 말씀을 통하여 통찰력과 분별력을 주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우리 자신과 남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그 순간에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너무나 그런 경우가 많은 자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역사와 삶의 질은 ‘세월을 아끼는’ 사람인가에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후회가 있다면 그것은 세월을 아끼고, 속량하지 못한 때문이요, 많은 믿음의 체험과 승리가 있다면 그 또한 붙들고 순종한 말씀이 있었기에 세월을 아끼고 속량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목양기도회와 금요느헤미야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본래는 그것을 소기도회에서 말하고자 하였지만, 마음에 그것이 있다 보니 오늘 말씀을 준비할 때 계속 생각을 하게 되고 본문 속에서 말하는 것도 좋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JBF들이나 아직 소위원이 아닌 분들은 편하게 들어도 됩니다. 적어도 소위원 이상인 분들은 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시면 합니다. 혹시 이번 주 자신의 스케쥴에 수요기도회 참석, 금요기도회 참석을 미리 계획하고 표시해 두었습니까? 만일 그것을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로 여기고 스케쥴을 잡는다면 참석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서약하고, 목자로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양들을 위해, 주일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요? 알고 보면 이처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모든 일 중에 기도의 응답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영적인 일 중에 무엇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자신은 아니라도 누군가의 기도의 빚을 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뭔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주신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은 아침 안개처럼 바람에 날리는 구름처럼 사라지는 일들이 되고 말 것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드리는 참에 또 한 가지가 더 생각이 나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그것은 지난 연 초 소기도회에서 재정부 보고를 통해 동역자들 중에서 십일조를 감당하는 비율을 듣고서였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물질의 주관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인터넷에 보면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것이지, 신약 시대는 십일조가 필요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그것은 헛된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말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신약 성경의 예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8:2-3의 여자들처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풀타임이 되어 섬기면서 모든 경비를 자기 소유로 전부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는 사도행전 4:32-37절의 예처럼 십일조가 아니라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윤리와 도덕의 측면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물질생활의 측면에서도 마땅히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책망을 듣고 잘못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돌이켜 행할 힘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합니다. 18절은 이에 대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우리가 어둠이었을 때 우리는 맨 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술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인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 술의 힘일 수는 없습니다. 술은 약간은 힘이 되지만, 마실수록 사람을 방탕하게 만들 뿐입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능력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님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우라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마치 술처럼 우리 안에 채울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 자체를 직역하면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라는 말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때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19-20절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20절은 4개의 현재분사형 동사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구절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면서, 찬송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중에 성령님은 무엇을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실까요?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는 중에 성령님은 무엇으로 우리의 내면을 가득 채워주실까요? 우리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 성령님은 무엇으로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주실까요? 바로 그렇게 성령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때로는 믿음이라고도 부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지혜라고도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말씀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마음으로 노래하고 찬송하면서, 범사에 항상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에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믿음으로, 지혜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빛의 자녀들로서 마땅한 바를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기 위해서는, 지혜 있는 자가 되고,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가 되고,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 세월을 아끼는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채워주시는 그런 것이 자기 안에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장의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요, 누가복음 4:1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고,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뜻이고, 사도행전 6장에서 선출된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뜻이고,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과정이 없는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은혜를, 믿음을, 지혜를 가득 채우시는 사람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삶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시대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구원의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건을 함께 섬기고 함께 경험하기 때문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이 없다면,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위대한 일들로 서로 화답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할 수 없습니다. 범사에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술은 아닐지라도 술이 상징하는 그런 세상의 만족 줄 것으로 취하게 되고, 하나님 일에서 신실함을 잃은 사람, 영적으로 방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우리를 보이고, 모든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변함없이, 아니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이 최고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열일을 제쳐두고 그 앞에 마음으로 무릎 꿇고 찬송을 드리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 때문에 한 주간의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예배를 계기로 범사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일에서,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와 돌이킴이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겸손히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예배든지, 요회 모임이든지, 공부모임이든지, 우리의 모임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면서, 마음으로 노래하고 찬송하면서, 범사에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를 통해 우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로서 은혜, 믿음, 사랑, 지혜, 기쁨, 소망, 깊은 회개의 심령 등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시대가 악할지라도 ‘세월을 아끼고 속량하는’ 놀라운 사건들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내가 속해 있는 주변의 세상에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을 비추고, 그 빛으로 변화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에베소서 제6강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공동체
말씀 / 에베소서 5:1-20
요절 /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For you were once 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Live as children of light. NIV)
오늘 말씀은 교회가 주변의 문화, 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어떤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칫 높아져서 세상을 비난하고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이 죄 아래 신음하는 약하고 상처받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변화되도록 섬기는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위해 어떤 연기를 펼쳐야 할까요? 얼마 전에는 ‘응답하라 1988’이, 요즈음은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인기 짱’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인공들의 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상의 이야기를 연기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혼신의 연기를 펼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역할을 연기할 때, 어떻게 연기해야 마땅할까요?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교회가 빛의 자녀들의 삶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이를 통해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교회가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삶을 살 때 대원칙과 같은 방향이 있습니다. 1-2a절은 바로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러므로’란 4장 후반부에서 말씀한 것을 받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새 사람으로서 살아야 함으로, 그러므로’란 말입니다. 새 사람이란 두 가지 정체성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고,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이므로 예수님이 명하신 새 계명에 순종해야 됩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옛 어른들의 말이 정말 맞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8:44). 자녀는 부모가 하는 행동이 좋든 나쁘든 그대로 배우고 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하게 되겠습니까?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게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요한복음 13:34에서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그린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녀라면, 또한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사는 제자라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3절 말씀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교회 공동체 중에서는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더럽고 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과 말은 자신과 남을 모두 해치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은 우리가 만일 무슨 말을 해야 한다면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로서 왜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바입니까? 성도라면 틀림없이 이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21:8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6:9-10에서도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정녕 알고 있다면, 성도로서 마땅하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헛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말을 말합니다. 헛된 말의 역사는 사탄이 시작한 것입니다. 헛된 말의 포장지는 아름다울 수 있고, 달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탐욕을 부추기고, 탐욕을 하나님 대신 섬기는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뱀을 이용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요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헛된 말은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죄를 짓게 만들었고, 죽음의 저주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헛된 말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금하시는 동성애를 여러 가지 이론으로 합리화 하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말일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누구든지 이런 헛된 말로 자신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속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든지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입니다. 바로 알고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성경공부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오늘과 같이 주일말씀을 듣는 것, 소감을 쓰는 것,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둔 말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이 점에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를 아는 것과, 우리 마음에 붙잡아 둔 말씀, 새겨둔 말씀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는 축구나 테니스를 이론적으로 잘 아는 것과,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혀 실력을 키우는 것이 전혀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경을 안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말씀을 새기고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며 붙잡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내 마음에 없으면, 사탄이 무슨 말로 속여도 속이는 줄도 모른 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론만 알지 실기 연습이 안 된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실전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공부한 것도 잊어버리기를 잘 합니다. 거기에다 성경은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다 공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분량이 방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겸손히 때마다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성도들은 새 사람으로서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빛의 일을 해야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라는 영적 어두움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9절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빛의 자녀로서 사는 것은 선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란 뜻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선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정의롭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그런 착함과 의로움이 한 때의 것이 아니요 평생의 것이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과 위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렇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으려면, 10절이 말씀하는 대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아야 합니다.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일일지라도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자기가 있으면 그는 실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거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직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을 때 그 행하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주변의 세상에 변화의 역사를 이루는 역할을 하고자 할 때,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입니다. 성도들이 빛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도 다른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어둠 가운데 행하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일,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일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해 주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마치 태양이 그 빛을 온 세상에 비추어야만 이루어지는 일들과 같습니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는 일, 죽은 듯 보이던 마른 가지에서 개나리와 목련화가 피어나고, 캠퍼스를 아름답게 하는 일은 태양이 그 빛을 비추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구원의 역사, 변화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해 주셔야 이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하고,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태양이 그 빛을 비출 때 온 세상에 위대한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듯이, 성도들이 빛의 자녀들처럼 삶으로써 비추는 빛이 그런 생명과 변화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11절에서와 같이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고수하는 것을 통해 도리어 그런 어둠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다. 책망하는 것은 드러내고 폭로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지 말로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을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의 어두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두움의 일은 빛의 일을 통해서 대조가 될 때 반드시 어둠의 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극적으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14절은 이사야 60:1에 기초한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를 내다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일어나 빛을 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빛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14절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이 잠자는 자처럼, 죽음 자처럼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자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빛을 비추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12월 31일 새해를 앞둔 자정에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한 남자가 자동소총을 들고 송구영신 예배 중인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가 총기참사의 자리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 닥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목사님이 침착하게 그에게 다가가 ‘네가 도와줄까요?’ 한 마디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 하며 안정을 찾게 되고 참사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사실 가장 먼저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이 닥칠 수도 있는 순간에도 모든 착함으로 한 사람을 선대하였습니다. 저라면 과연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게는 그 사건은 빛의 자녀가 발한 작은 빛이 한 순간에 어둠을 책망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이룬 역사로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빛의 자녀로서의 삶에는 그가 발하는 빛으로 세상을 책망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 빛을 발하는 것은 15절에서와 같이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해야 됩니다. 여기서 지혜란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력, 분별력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이런 지혜 있는 자가 될 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16절이 명령하는 일입니다. 16절은 그 일을 두고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낀다는 단어는 시간을 아낀다고 할 때 쓰이는 그런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속량하신다’고 할 때의 ‘속량하다’는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을 속량하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슨 말인지를 쉽게 다가오는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풀어서 말하면, 결정적인 어떤 순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써 행함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빛을 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앞에서 예를 든 사건에서 목사님이 자동소총을 든 사람을 발견한 그 순간에 한 일과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런 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위험합니다. 엎드리세요, 피하십시오’ 하며, 자신도 강대상 뒤로 몸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순간에 어떻게 하느냐는 참으로 분별력,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예수님이 하신 일에서 가장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은 여자를 거칠게 끌고 들어와 예수님 앞에 세우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사납게 묻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해야 하는 순간이요,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않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빛을 발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고,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여자를 죽음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는 말씀이 뜻하는 그런 일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을 아끼는’ 일은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긴박한 순간, 두 번 다시 반복해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평소에 해야 하는 일이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요, 기도하는 일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결코 참된 지혜가 있는 자, 세월을 아끼고, 속량하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 있는 자,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그런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세월을 아끼는 일, 곧 속량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긴박하여 침 삼킬 시간 동안의 짧은 순간에 ‘주여’ 하며 순간의 기도 밖에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되 우리 안에 이미 있는 말씀을 통하여 통찰력과 분별력을 주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우리 자신과 남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그 순간에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너무나 그런 경우가 많은 자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역사와 삶의 질은 ‘세월을 아끼는’ 사람인가에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후회가 있다면 그것은 세월을 아끼고, 속량하지 못한 때문이요, 많은 믿음의 체험과 승리가 있다면 그 또한 붙들고 순종한 말씀이 있었기에 세월을 아끼고 속량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목양기도회와 금요느헤미야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본래는 그것을 소기도회에서 말하고자 하였지만, 마음에 그것이 있다 보니 오늘 말씀을 준비할 때 계속 생각을 하게 되고 본문 속에서 말하는 것도 좋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JBF들이나 아직 소위원이 아닌 분들은 편하게 들어도 됩니다. 적어도 소위원 이상인 분들은 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시면 합니다. 혹시 이번 주 자신의 스케쥴에 수요기도회 참석, 금요기도회 참석을 미리 계획하고 표시해 두었습니까? 만일 그것을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로 여기고 스케쥴을 잡는다면 참석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서약하고, 목자로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양들을 위해, 주일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요? 알고 보면 이처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모든 일 중에 기도의 응답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영적인 일 중에 무엇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자신은 아니라도 누군가의 기도의 빚을 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뭔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주신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은 아침 안개처럼 바람에 날리는 구름처럼 사라지는 일들이 되고 말 것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드리는 참에 또 한 가지가 더 생각이 나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그것은 지난 연 초 소기도회에서 재정부 보고를 통해 동역자들 중에서 십일조를 감당하는 비율을 듣고서였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물질의 주관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인터넷에 보면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것이지, 신약 시대는 십일조가 필요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그것은 헛된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말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신약 성경의 예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8:2-3의 여자들처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풀타임이 되어 섬기면서 모든 경비를 자기 소유로 전부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는 사도행전 4:32-37절의 예처럼 십일조가 아니라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윤리와 도덕의 측면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물질생활의 측면에서도 마땅히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책망을 듣고 잘못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돌이켜 행할 힘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합니다. 18절은 이에 대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우리가 어둠이었을 때 우리는 맨 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술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인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 술의 힘일 수는 없습니다. 술은 약간은 힘이 되지만, 마실수록 사람을 방탕하게 만들 뿐입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능력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님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우라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마치 술처럼 우리 안에 채울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 자체를 직역하면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라는 말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때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19-20절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20절은 4개의 현재분사형 동사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구절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면서, 찬송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중에 성령님은 무엇을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실까요?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는 중에 성령님은 무엇으로 우리의 내면을 가득 채워주실까요? 우리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 성령님은 무엇으로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주실까요? 바로 그렇게 성령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때로는 믿음이라고도 부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지혜라고도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말씀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마음으로 노래하고 찬송하면서, 범사에 항상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에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믿음으로, 지혜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빛의 자녀들로서 마땅한 바를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기 위해서는, 지혜 있는 자가 되고,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가 되고,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 세월을 아끼는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채워주시는 그런 것이 자기 안에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장의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요, 누가복음 4:1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고,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뜻이고, 사도행전 6장에서 선출된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뜻이고,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과정이 없는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은혜를, 믿음을, 지혜를 가득 채우시는 사람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삶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시대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구원의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건을 함께 섬기고 함께 경험하기 때문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이 없다면,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위대한 일들로 서로 화답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할 수 없습니다. 범사에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술은 아닐지라도 술이 상징하는 그런 세상의 만족 줄 것으로 취하게 되고, 하나님 일에서 신실함을 잃은 사람, 영적으로 방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우리를 보이고, 모든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변함없이, 아니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이 최고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열일을 제쳐두고 그 앞에 마음으로 무릎 꿇고 찬송을 드리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 때문에 한 주간의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예배를 계기로 범사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일에서,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와 돌이킴이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겸손히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예배든지, 요회 모임이든지, 공부모임이든지, 우리의 모임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면서, 마음으로 노래하고 찬송하면서, 범사에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를 통해 우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로서 은혜, 믿음, 사랑, 지혜, 기쁨, 소망, 깊은 회개의 심령 등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시대가 악할지라도 ‘세월을 아끼고 속량하는’ 놀라운 사건들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내가 속해 있는 주변의 세상에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을 비추고, 그 빛으로 변화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