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8강
진정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공동체
말씀 / 에베소서 6:10-24
요절 / 에베소서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NIV)
우리는 지금까지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만드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교회의 머리로, 교회의 모퉁잇돌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성령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충전함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낮아져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교회가 어느 한 동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굳게 서 있기 위한 길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날까지 이런 교회로 서 있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간계(음모)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마귀의 음모가 무엇이며, 이런 마귀의 음모를 대적하는 교회의 진정한 영적 전쟁은 어떤 것이며, 이런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도 말씀에 기초해 바르게 잘 배움으로써 주님 오시는 그날에 주 앞에 다 함께 굳게 서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적인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3년간 에베소에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의 말씀 역사로 세워지게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는 사도 바울이 이런 에베소 교회를 떠나는 가운데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따로 불러 전한 고별 메시지가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앞날에 대해 경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회를 이루는 모든 양 떼를 위하여 잘못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인데, 그런 교회를 잘 보살피지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잘못되게 해서는 그 책임이 결코 작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문제도 생길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떠난 후 사나운 이리로 비유한 어떤 악한 자들이 그들 가운데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은 한국 교회에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않고 사욕의 제물로 삼은 수많은 이단들, 2년 전 세월호의 참사를 낳은 구원파나, 신천지와 같은 세력이 될 수도 있고, 물질주의나 번영주의와 같은 세속주의 사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지금 자신의 고별 메시지를 듣고 있는 에베소의 장로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난 3년 동안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세운 에베소의 교회가운데 그런 일도 있게 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거기가면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목숨을 잃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해서 걱정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에도 믿고 의지할 것이 있음을 잊지 않고 그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0:32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리시라.” 이 말씀에서 보면, 그런 악한 일이 일어나는 날에도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이렇게 고별메시지에서 예견했던 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에베소의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에베소서를 쓴 때는 그때로부터 5년여가 지난 후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아직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언제든지 그들 가운데 영적인 전쟁이 벌어질 수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를 통해서 그런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말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의 결론에 해당되는 오늘 본문의 10절을 ‘종말로’라고 하며 시작하는 데 담긴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 자체는 ‘마지막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꼭 더 말하고자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베소의 교회가 반드시 직면하게 되고, 반드시 수행하고, 그래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전쟁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전에, 10절은 이런 전쟁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를 먼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이 강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 나서는 군인이 강건하지 못하면 싸움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적들이 공격해 오면 초반에 제압당해 패배하거나,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하려면 먼저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강건해 질 수 있습니까? 10절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야 한다고 합니다.
주 안에서 강건해지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약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은 한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때 우리는 어떤 대적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은 그런 그림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5-6장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가 그랬습니다.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동안 돌 하나 던지지 않고, 화살 한 방 쏘지 않고 여리고성을 돌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싸움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싸움이며, 하나님을 위한 싸움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을 믿었고, 이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싸움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강해졌고, 여리고성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 이은 더 작은 성인 아이성 싸움에서는 패배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작은 성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자기들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17장에서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형들이 볼 때 인간적으로 남자도 아닌 소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었습니다. 형들에 비해, 골리앗에 비해 약했고, 작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강건하여질 수 있었고, 거구의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크고 강한 골리앗 앞에서는 인간적으로 강건한 사람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키가 머리만큼 더 큰 사울 왕도,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처럼 키도 크고 훤칠한 장성한 다윗의 형들의 강건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다윗과 같이 주 안에서 강건해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강건하여질 수 있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이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힘의 능력을 얼마든지 동원하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전쟁에서 능히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진 성도들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위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간계란 더 쉬운 말로 음모를 말합니다. 음모란, 표면적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가운데,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모든 계획을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는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사람을 망하게 하고 죽게 만들기 위하여 음모를 진행했습니다. 그것이 여자를 통해 아담을 죄를 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마귀의 음모를 간파하고 대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치 오늘날 전투에 나서는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신 갑주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영적인 차원의 장비들로 완전 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12절이 가르쳐 주시듯이, 우리의 씨름 곧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이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할 마귀는 그런 차원의 존재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 받는 혈과 육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 하늘에 있는 영적 차원의 존재입니다. 그들이 바로 12절이 말하고 있는 마귀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곧 하늘의 차원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악한 날이란, 5장 16절에서 ‘때가 악하니라’고 할 때와 같은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신약 시대의 한 특징을 말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 안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마귀의 세력에게 승리를 거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마귀 자체가 멸망당한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어둠의 주관자로서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성도들을 공격하여 타락하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귀가 여전히 활동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은 악한 날들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마귀가 음모 속에서 사람들이나 사건들을 통해서 역사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마귀가 음모를 꾸미고 역사하는 악한 날에 우리가 성도로서 능히 대적할 때, 다시 말해 5:16에서 말한 세월을 아끼는 사건을 이룰 때 우리는 능히 성도의 위치에 계속 굳게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실족하거나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십자가의 길에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해야 할 완전한 무장은 어떤 것들을 포함합니까? 14-17절은 그것을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곧 방탄조끼를 입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며,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와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 등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 자신의 영적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때만, 마귀의 세력의 어떤 음모도 분별하고, 음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다면, 뱀의 수작은 여자에게 전혀 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셨고, 마귀의 어떤 유혹도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때,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의 존재들인 악한 영들을 공격하고 물러가게 할 수 있는 공격 무기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 완전무장을 하는 것은 영적 싸움을 감당할 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영적 무장을 갖춘 성도들을 마귀는 결코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거룩함을 잃고 세속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 어떤 음모를 가지고 공격하고자 할지라도 통하지가 않게 됩니다. 마귀를 보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드는 음모를 진행했고 성공했습니다. 마귀는 이제도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훼방하기 위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거룩성을 잃게 하고자 하고, 세상에 물들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음모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완전무장한 교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교회가 될 때 그런 교회는 마귀가 결코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직면하는 영적인 전투는 혈과 육을 가진 대상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늘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적인 전투는 차원이 다른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악의 영들의 실체와 직접적으로 맞붙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통해서 수행하는 전쟁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들어가 복음역사를 이룰 때, 모든 겸손으로, 눈물을 흘림으로, 유대인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당하는 시련을 참고 다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 없이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시대 속에서 비록 소수의 동역자들과 수행한 것이지만, 진정한 영적 전쟁을 감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로서 수행해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통해서 수행하는 전투입니다. 겸손과 자기희생으로, 약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성육신의 생애를 본받는 삶입니다. 이것이 전쟁인 이유는 하늘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악한 영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세상을 따라 타락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본받고 세상 사람들처럼,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행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전쟁은 그런 악한 영들을 향하여 ‘귀신아 나가라,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로써 대적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교회의 전쟁은 그런 악한 영들의 음모에 말려들지 않고, 문화를 통해 역사하고 있는 그들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한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배운 대로 말하면, 영적 전쟁은 악한 시대 속에서 세월을 아끼는 사건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지혜 있게 행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임을 배웠습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성도들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한다는 것은 결코 하늘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적 존재들과 직접적인 무슨 싸움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사탄을 꾸짖거나, 귀신들에게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전쟁은 우리가 속한 지상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우상 숭배적이고 파괴적인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 속에서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지시하는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본은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며 보여주신 복음서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며, 죄인들을 향한 자기희생적 섬김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도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셔서 교회가 되게 하신 성도들로서 우리의 삶의 방식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방식,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의 삶을 배우고 본받을 때, 그것이야말로 교회로서 진정한 영적 전쟁을 감당하는 것이 됩니다. 몇 주 전에 ‘흘려보내야 산다’는 주제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며 마른 땅을 적시고 그러면서 많은 생명들을 살립니다. 이는 성도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천상경이라는 한 목사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절망하고, 10번 이상의 자살을 시도하는 절망적인 순간까지 갔습니다. 왜냐하면 건강을 잃게 되었고, 설교하고 찬송해야 하는 목사로서 목소리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귀가 그런 현실에 대한 세상적인 관점을 갖게 하며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현재를 보면 너는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인데 그것을 모르고 목회를 하려고 했으니 될 리가 없었다’는 불신과 절망을 심었습니다. 그의 현실은 정말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물이 낮은 데로 흘러가 생명을 살리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교회들이 있었고 그에게도 그런 은혜가 흘러왔습니다. 그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요양원에서 그가 비록 요양원에서 생활하지만, 자기보다 더 작은 자 한 노인을 예수님의 심장으로 품고 섬기는 삶을 사는 모습, 다시 은혜와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서 겉으로 보기에 많은 주의 일을 한 것 같지만 예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마태복음 25장에서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았지만 작은 자에게 행한 사랑의 섬김으로 인해 영생에 들어가는 의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관은 세상의 그것과 다른 것입니다. 영상에서 본 그 분의 이야기는 진정한 영적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해주는 경우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목회자로서의 삶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그는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삶의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서 있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함께 하는 성도들로서의 교회가 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18절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 줍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이는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할 할 수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입니다. 모든 기도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다 말하며, 간구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요청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때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 성도들을 위한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여러 성도들이 처한 영적 전쟁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서 음모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음모를 꾸미고 뱀을 통하여 여자에게 역사했듯이, 마귀가 여러 성도들 가운데 음모를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음모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잊게 만들고, 세상을 따르게 만들고, 두려움과 불신, 염려, 탐욕, 이기심을 심고, 율법주의나 온갖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따르게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들의 공동체는 그런 영적인 전쟁에 직면해 있는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땅히 기도할 것을 분별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도하기를 힘쓰는 것은 이런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하며 포기치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고, 여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더 나아가 이런 모든 기도와 간구를 힘쓰는 그 사람 자신이 누구보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게 해 주십니다.
결국, 에베소를 통해서 보면 교회의 진정한 영적 전쟁은 여러 성도를 향한 악의 영들의 음모를 대적하며 그들을 지키는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런 영적 전쟁을 직면하게 되고, 이런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는 일을 하고, 영적인 대적들에게 맞설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영적 전쟁에 직면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성령 안에서 항상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을 믿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도 물론 영적인 전쟁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을 받게 한 성도들을 지키는 일도 매우 중요한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교회를 생각할 때, 그들을 향한 마귀의 음모를 직시하였고, 성도들이 그런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키고 동료들을 지키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 동안에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불가피하게 그들을 떠나 다른 일을 섬겨야 했을 때, 몸은 떠나 있지만 마음은 그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로마의 감옥 속에 갇힌 가운데서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서 영적 전쟁을 다시 준비시키고,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서의 교회 이야기는 바로 그런 기도의 열매요, 영적 전쟁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그에게 말씀을 주사 그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현재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어 있지만, 그는 이것조차도 복음의 비밀을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뜻 두신 사람들에게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 역시 영적 전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1-24절은 바울이 편지를 마치며, 이런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의 형제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는 반드시 직면하게 되고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영적 전쟁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 내용은 함께 교회를 이루는 여러 성도들을 악한 시대 속에서 마귀의 음모로부터 지키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런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 가장 실제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가 말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교회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려고 음모를 진행하는 마귀의 음모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영적 전쟁을 잘 감당해야만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이제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고자 음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을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십자가의 길,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길을 가는 대신에, 세상의 풍조와 문화를 따라 넓은 길을 가도록 유혹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영적 전쟁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로서, 이런 마귀의 유혹의 뒤에 있는 마귀의 음모, 결국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이 뜻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음모를 능히 대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하는 교회의 여러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런 마귀의 음모에 빠지고 실족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는 일인 신앙의 성장을 이루며, 다 말씀이 있도록 힘써 섬기며, 모든 기도에 힘쓰는 우리가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에베소서 제8강
진정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공동체
말씀 / 에베소서 6:10-24
요절 / 에베소서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NIV)
우리는 지금까지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만드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교회의 머리로, 교회의 모퉁잇돌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고, 새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성령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충전함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낮아져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교회가 어느 한 동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굳게 서 있기 위한 길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날까지 이런 교회로 서 있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간계(음모)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마귀의 음모가 무엇이며, 이런 마귀의 음모를 대적하는 교회의 진정한 영적 전쟁은 어떤 것이며, 이런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도 말씀에 기초해 바르게 잘 배움으로써 주님 오시는 그날에 주 앞에 다 함께 굳게 서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적인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3년간 에베소에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의 말씀 역사로 세워지게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는 사도 바울이 이런 에베소 교회를 떠나는 가운데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따로 불러 전한 고별 메시지가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앞날에 대해 경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회를 이루는 모든 양 떼를 위하여 잘못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인데, 그런 교회를 잘 보살피지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잘못되게 해서는 그 책임이 결코 작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문제도 생길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떠난 후 사나운 이리로 비유한 어떤 악한 자들이 그들 가운데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은 한국 교회에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않고 사욕의 제물로 삼은 수많은 이단들, 2년 전 세월호의 참사를 낳은 구원파나, 신천지와 같은 세력이 될 수도 있고, 물질주의나 번영주의와 같은 세속주의 사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지금 자신의 고별 메시지를 듣고 있는 에베소의 장로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난 3년 동안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세운 에베소의 교회가운데 그런 일도 있게 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거기가면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목숨을 잃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해서 걱정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에도 믿고 의지할 것이 있음을 잊지 않고 그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0:32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리시라.” 이 말씀에서 보면, 그런 악한 일이 일어나는 날에도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이렇게 고별메시지에서 예견했던 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에베소의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에베소서를 쓴 때는 그때로부터 5년여가 지난 후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아직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언제든지 그들 가운데 영적인 전쟁이 벌어질 수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를 통해서 그런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말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의 결론에 해당되는 오늘 본문의 10절을 ‘종말로’라고 하며 시작하는 데 담긴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 자체는 ‘마지막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꼭 더 말하고자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베소의 교회가 반드시 직면하게 되고, 반드시 수행하고, 그래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전쟁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전에, 10절은 이런 전쟁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를 먼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이 강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 나서는 군인이 강건하지 못하면 싸움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적들이 공격해 오면 초반에 제압당해 패배하거나,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하려면 먼저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강건해 질 수 있습니까? 10절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야 한다고 합니다.
주 안에서 강건해지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약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은 한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때 우리는 어떤 대적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은 그런 그림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5-6장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가 그랬습니다.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동안 돌 하나 던지지 않고, 화살 한 방 쏘지 않고 여리고성을 돌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싸움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싸움이며, 하나님을 위한 싸움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을 믿었고, 이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싸움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강해졌고, 여리고성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 이은 더 작은 성인 아이성 싸움에서는 패배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작은 성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자기들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17장에서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형들이 볼 때 인간적으로 남자도 아닌 소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었습니다. 형들에 비해, 골리앗에 비해 약했고, 작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강건하여질 수 있었고, 거구의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크고 강한 골리앗 앞에서는 인간적으로 강건한 사람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키가 머리만큼 더 큰 사울 왕도,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처럼 키도 크고 훤칠한 장성한 다윗의 형들의 강건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다윗과 같이 주 안에서 강건해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강건하여질 수 있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이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힘의 능력을 얼마든지 동원하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전쟁에서 능히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진 성도들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위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간계란 더 쉬운 말로 음모를 말합니다. 음모란, 표면적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가운데,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모든 계획을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는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사람을 망하게 하고 죽게 만들기 위하여 음모를 진행했습니다. 그것이 여자를 통해 아담을 죄를 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마귀의 음모를 간파하고 대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치 오늘날 전투에 나서는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신 갑주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영적인 차원의 장비들로 완전 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12절이 가르쳐 주시듯이, 우리의 씨름 곧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이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할 마귀는 그런 차원의 존재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 받는 혈과 육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 하늘에 있는 영적 차원의 존재입니다. 그들이 바로 12절이 말하고 있는 마귀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곧 하늘의 차원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악한 날이란, 5장 16절에서 ‘때가 악하니라’고 할 때와 같은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신약 시대의 한 특징을 말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 안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마귀의 세력에게 승리를 거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마귀 자체가 멸망당한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어둠의 주관자로서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성도들을 공격하여 타락하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귀가 여전히 활동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은 악한 날들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마귀가 음모 속에서 사람들이나 사건들을 통해서 역사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마귀가 음모를 꾸미고 역사하는 악한 날에 우리가 성도로서 능히 대적할 때, 다시 말해 5:16에서 말한 세월을 아끼는 사건을 이룰 때 우리는 능히 성도의 위치에 계속 굳게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실족하거나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십자가의 길에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해야 할 완전한 무장은 어떤 것들을 포함합니까? 14-17절은 그것을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곧 방탄조끼를 입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며,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와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 등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 자신의 영적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때만, 마귀의 세력의 어떤 음모도 분별하고, 음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다면, 뱀의 수작은 여자에게 전혀 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셨고, 마귀의 어떤 유혹도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때,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의 존재들인 악한 영들을 공격하고 물러가게 할 수 있는 공격 무기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 완전무장을 하는 것은 영적 싸움을 감당할 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영적 무장을 갖춘 성도들을 마귀는 결코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거룩함을 잃고 세속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 어떤 음모를 가지고 공격하고자 할지라도 통하지가 않게 됩니다. 마귀를 보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드는 음모를 진행했고 성공했습니다. 마귀는 이제도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훼방하기 위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거룩성을 잃게 하고자 하고, 세상에 물들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음모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완전무장한 교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교회가 될 때 그런 교회는 마귀가 결코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직면하는 영적인 전투는 혈과 육을 가진 대상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늘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적인 전투는 차원이 다른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악의 영들의 실체와 직접적으로 맞붙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통해서 수행하는 전쟁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들어가 복음역사를 이룰 때, 모든 겸손으로, 눈물을 흘림으로, 유대인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당하는 시련을 참고 다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 없이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시대 속에서 비록 소수의 동역자들과 수행한 것이지만, 진정한 영적 전쟁을 감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로서 수행해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통해서 수행하는 전투입니다. 겸손과 자기희생으로, 약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성육신의 생애를 본받는 삶입니다. 이것이 전쟁인 이유는 하늘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악한 영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세상을 따라 타락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본받고 세상 사람들처럼,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행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전쟁은 그런 악한 영들을 향하여 ‘귀신아 나가라,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로써 대적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교회의 전쟁은 그런 악한 영들의 음모에 말려들지 않고, 문화를 통해 역사하고 있는 그들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한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배운 대로 말하면, 영적 전쟁은 악한 시대 속에서 세월을 아끼는 사건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지혜 있게 행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임을 배웠습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성도들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한다는 것은 결코 하늘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적 존재들과 직접적인 무슨 싸움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사탄을 꾸짖거나, 귀신들에게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전쟁은 우리가 속한 지상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우상 숭배적이고 파괴적인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 속에서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지시하는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본은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며 보여주신 복음서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며, 죄인들을 향한 자기희생적 섬김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도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셔서 교회가 되게 하신 성도들로서 우리의 삶의 방식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방식,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의 삶을 배우고 본받을 때, 그것이야말로 교회로서 진정한 영적 전쟁을 감당하는 것이 됩니다. 몇 주 전에 ‘흘려보내야 산다’는 주제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며 마른 땅을 적시고 그러면서 많은 생명들을 살립니다. 이는 성도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천상경이라는 한 목사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절망하고, 10번 이상의 자살을 시도하는 절망적인 순간까지 갔습니다. 왜냐하면 건강을 잃게 되었고, 설교하고 찬송해야 하는 목사로서 목소리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귀가 그런 현실에 대한 세상적인 관점을 갖게 하며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현재를 보면 너는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인데 그것을 모르고 목회를 하려고 했으니 될 리가 없었다’는 불신과 절망을 심었습니다. 그의 현실은 정말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물이 낮은 데로 흘러가 생명을 살리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교회들이 있었고 그에게도 그런 은혜가 흘러왔습니다. 그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요양원에서 그가 비록 요양원에서 생활하지만, 자기보다 더 작은 자 한 노인을 예수님의 심장으로 품고 섬기는 삶을 사는 모습, 다시 은혜와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서 겉으로 보기에 많은 주의 일을 한 것 같지만 예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마태복음 25장에서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았지만 작은 자에게 행한 사랑의 섬김으로 인해 영생에 들어가는 의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관은 세상의 그것과 다른 것입니다. 영상에서 본 그 분의 이야기는 진정한 영적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해주는 경우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목회자로서의 삶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그는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삶의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서 있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함께 하는 성도들로서의 교회가 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18절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 줍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이는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할 할 수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입니다. 모든 기도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다 말하며, 간구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요청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때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 성도들을 위한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여러 성도들이 처한 영적 전쟁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서 음모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음모를 꾸미고 뱀을 통하여 여자에게 역사했듯이, 마귀가 여러 성도들 가운데 음모를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음모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잊게 만들고, 세상을 따르게 만들고, 두려움과 불신, 염려, 탐욕, 이기심을 심고, 율법주의나 온갖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따르게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들의 공동체는 그런 영적인 전쟁에 직면해 있는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땅히 기도할 것을 분별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도하기를 힘쓰는 것은 이런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하며 포기치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고, 여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더 나아가 이런 모든 기도와 간구를 힘쓰는 그 사람 자신이 누구보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게 해 주십니다.
결국, 에베소를 통해서 보면 교회의 진정한 영적 전쟁은 여러 성도를 향한 악의 영들의 음모를 대적하며 그들을 지키는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런 영적 전쟁을 직면하게 되고, 이런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는 일을 하고, 영적인 대적들에게 맞설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영적 전쟁에 직면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성령 안에서 항상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을 믿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도 물론 영적인 전쟁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을 받게 한 성도들을 지키는 일도 매우 중요한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교회를 생각할 때, 그들을 향한 마귀의 음모를 직시하였고, 성도들이 그런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키고 동료들을 지키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 동안에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불가피하게 그들을 떠나 다른 일을 섬겨야 했을 때, 몸은 떠나 있지만 마음은 그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로마의 감옥 속에 갇힌 가운데서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서 영적 전쟁을 다시 준비시키고,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서의 교회 이야기는 바로 그런 기도의 열매요, 영적 전쟁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그에게 말씀을 주사 그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현재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어 있지만, 그는 이것조차도 복음의 비밀을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뜻 두신 사람들에게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 역시 영적 전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1-24절은 바울이 편지를 마치며, 이런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의 형제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는 반드시 직면하게 되고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영적 전쟁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 내용은 함께 교회를 이루는 여러 성도들을 악한 시대 속에서 마귀의 음모로부터 지키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런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 가장 실제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가 말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교회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려고 음모를 진행하는 마귀의 음모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영적 전쟁을 잘 감당해야만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이제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고자 음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을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십자가의 길,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길을 가는 대신에, 세상의 풍조와 문화를 따라 넓은 길을 가도록 유혹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영적 전쟁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로서, 이런 마귀의 유혹의 뒤에 있는 마귀의 음모, 결국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이 뜻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음모를 능히 대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하는 교회의 여러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런 마귀의 음모에 빠지고 실족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는 일인 신앙의 성장을 이루며, 다 말씀이 있도록 힘써 섬기며, 모든 기도에 힘쓰는 우리가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